[시진핑시대 핵심100인] <95>왕싼윈 – 34년 공직생활, 2011년 간쑤성 서기에 올라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2-01-05 16:46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베이징=조용성 특파원) 2011년12월16일 간쑤(甘肅)성 칭양(慶陽)시에서 무려 64명을 태운 9인승 유치원 통학버스가 사고를 일으켜 어린이 19명이 숨지는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고위관료들의 이미지에 오버랩되면서 중국 민심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 중앙은 내년 4월 퇴임이 예정돼 있던 루하오(陸浩) 간쑤성 서기를 5개월 앞당겨 물러나게 한다. 중공중앙은 인사조치의 배경을 공식적으로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베이징 정가에서는 간쑤성 유치원 통학버스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물은 조치라는 분석이 나왔다. 루하오의 후임자로 왕싼윈(王三運) 안후이성(安徽) 성장 겸 당 부서기가 임명됐다. 왕싼윈은 그해 10월 안후이성 대표대회에서 안후이성 부서기로 연임된 데 이어 2개월이 채 못돼 지역을 옮기게 된 것이다.

왕싼윈은 1952년12월 산둥(山東)성 단(單)현에서 태어났다. 1968년 12월 지식청년으로 하방돼 구이저우(貴州)성 즈진(織金)현의 인민공사에서 근무했다. 성적이 뛰어났던 데다 교사들이 모두 하방된 영향으로 그는 즈진현 제1중학교에서 대리교사로 근무했다. 그리고 그는 공농병청강생 자격으로 1974년 그는 구이양(貴陽)시 사범학원 중문과에 입학했다. 1976년 문화대혁명이 종료됐고 그는 이듬해 구이양사범학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학교에 남아 당위원회 판공실에서 근무하게 된다.

당시는 문혁이 종료된 후 각방면에서 인재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였다. 정규대학생은 아예 없었으며 공농병청강생마저도 몹시 귀한 때였다. 구이저우성 조직부는 대졸자인 왕싼윈을 조직부 비서로 채용했다. 그리고 1984년 구이저우성 조직부 청년간부처 부처장으로 발탁했다. 그는 공청단에서 일한 적은 없었지만 청년간부처 부처장인 만큼 덕과 재능을 겸비한 청년일꾼들의 공급원 역할을 하던 공청단의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다.

1998년 그는 구이저우성 부서기마저 겸임하게 되는 등 순항을 거듭한다. 그해 그는 중앙당교 정치학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3년후인 2001년 그는 중앙당교에서 석사학위를 딴 후 그는 쓰촨(四川)성 부서기로 이동해갔다. 직급상 수평이동이었지만 1억인구인 쓰촨성의 비중을 따진다면 사실상 영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쓰촨에서 반년여밖에 머물지 못했다. 새로운 사무실에 적응도 하기 전에 그는 같은해 10월 푸젠(福建)성 부서기로 이동해갔다. 그는 2007년 안후이성 성장으로 영전했고 2011년에 간쑤성 서기로 승진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아주NM&C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