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20주년 기획> "韓 외교사 가장 큰 사건…007작전처럼 협상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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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7-26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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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국방장관, 군사협력…“피할 수 없는 외교 안건이죠”<br/>④수교 협상자에게 들어본다<br/>권병현 한중문화청소년협회장

아주경제 강정숙 기자= “차(茶)를 좋아한다. 차는 내 라오펑요우(오랜 친구)다. 혼자 있을 때도 차를 마시고, 차 만큼 좋은 친구도 별로 없다.”

과거 도요(陶窯)를 갖고 있었을 정도로 차와 다기(茶器)를 좋아했던 권병현 한중문화청소년협회 회장(73·전 주중한국대사)을 25일 서울시 종로구 무악동에 위치한 미래숲 사무실에서 만났다.

차를 좋아한다는 기자에게“차를 좋아하면 곧 친구가 되지요”라며‘설수설록(雪水雪綠)’이란 중국차를 따른다. 그는 3년 전 기자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보다 더 에너지가 넘쳤다.

중국에서 한·중 청년 교류와 사막 녹화 사업에 앞장서는 민간 외교관으로 변신한 그는 요즘에도 한달에 한번꼴로 중국을 방문한다. 지금은 사막 녹화 사업을 위해 중국을 방문하는 그지만 정확히 20년 전, 숨막히는 첩보전을 방불케 했던 비밀교섭을 위해 베이징 행(行)을 했었다.

◆ 한·중수교 64년 한국외교史 중 가장 큰 모험

64년간 줄달음해온 한국 외교사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치열했던 ‘전쟁의 기록’이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세계역사상 전례를 찾기 어려운 발전과 변화를 이룩한 데는 막후에서 활약한 외교의 역할도 컸다.

“한국 외교사에서 한·중 수교는 가장 큰 교섭이자 가장 큰 사건”이라고 권 대사는 말한다.

한·중수교는 한마디로 ‘정보전’의 승리였다. 대만과 북한은 각각 자국의 최대우방국인 한국과 중국이 어디에선가 수교를 논의하고 있다는 눈치를 채고 이를 예리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특히 북한이 고도의 정보망을 동원해 한·중수교 움직임을 간파하고 적극적으로 방해 공작을 펴는 것이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였다.

덩샤오핑의 특별지시에 따라 비밀교섭을 추진하던 중국 측은 북한에도 극비보안을 유지했으나 김일성의 중국내 영향력이 워낙 막강한 터라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교협상에 가담한 한국의 외교관들은 가히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첩보전을 펼쳤다.

당시 국내에서 한·중수교 추진 사실을 아는 사람은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종휘 당시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이상옥 외무장관, 김석우 외무부 아주국장 정도였다.

◆ 한·중 첫 공식 접촉
1992년 4월13일,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지천(錢其琛) 당시 중국 외교부장은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조어대) 18호 각에서 단독으로 만난다.

첸 부장은 한·중수교 비밀창구를 개설하자고 이 장관에게 말한다. 그는 “한국측 교섭대표를 임명해 달라, 중국 측도 임명하겠다”며 수교교섭을 제의한다.

한·중 수교 당시 예비교섭 대표로 활약했던 권 대사가 이 극비상황을 안 시점은 두 외교 수장들이 단독으로 만난 직후였다.

이상옥 외무장관은 그 해 5월6일 한·중 수교문제를 논의할 예비교섭 대표로 권병현 외무부 본부대사(외교안보연구원 근무)를 정하고 권 대사에게 이를 정식 통고했다. 권 대사의 카운터 파트너는 장루이지에(張瑞杰) 본부대사였다.

이 장관은 권 대사에게 고향 아버님이 병환 중이어서 시골에 가있는 것으로 위장하라고 지시했다. 신정승 동북아 2과장(주중 대사.2008~2009)은 그날로 병가를 내고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가장해 권 대사를 도왔다.

다음날 부터 권 대사와 신 과장은 동빙고동 안가로 배치돼 역사적인 한·중수교 비밀회담 실무준비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안기부장과 차장, 차장보도 와있었다. 김석우 아주국장은 밤중에 혼자 차를 몰고 안가에 와서는 권 대사가 준비한 보고서를 장관에게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았다.

권 대사는 5월 12일 벙거지를 쓰고 홍콩을 경유해 베이징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신정승 당시 과장은 통역을 맡은 이영백 당시 사무관과 도쿄를 경유해 베이징으로 간다. 마지막 한 팀은 서울에서 톈진으로 그리고 육로를 통해 베이징에 도착한다. 이들 세팀은 13일 같은 시간에 댜오위타오에서 만난다.

중국 베이징의 국빈관 댜오위타이 14루. 댜오위타이에서도 가장 구석진 14루 오른쪽 첫 번째 방, 한·중수교 비밀 교섭이 시작된 역사적 장소다.

신 대사는 “한·중 양국의 1차 실무회담은 아주 캄캄한 곳에서 시작했다”며 당시의 숨막히는 첩보전과 긴장감에 회고하는 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며 우리에게 대만과의 단교를 요구했다. 하지만 임시정부 시절부터 건국과정까지 대만에 큰 빚을 졌던 정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앞이 캄캄했죠. 극비리에 추진하는 만큼 수교를 조기에 달성해야 하는 부담감이 컸지요. 무엇보다 대만이나 북한에 새어 나갈까봐 노심초사했습니다.” 권 대사의 회고다.

당시 교섭대표단은 그해 5월13일부터 6월21일까지 베이징과 서울에서 3차례에 걸친 교섭을 갖고 수교원칙을 재확인한 뒤 공동성명 문안을 집중 협의했다.

결국 7월29일 노창희 외무차관이 베이징을 방문해 쉬둔신(徐敦信) 외교부 부부장과 면담, 한·중수교 공동성명 문안과 발표날짜를 확정하고 공동성명 합의문에 가서명했다. 수교 발표일(8월 24일)까지는 약 1개월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문제는 한·중 수교로 타격이 불가피한 대만과 북한에 어떻게 최후통첩을 하느냐였다. 대만과 북한은 각각 한국과 중국이 어디선가 수교를 논의하고 있다는 눈치를 채고 이를 추적하고 있었다.

◆ 北 “우리는 자주노선 걷겠다”

7월15일. 중국이 먼저 움직였다. 7월15일 첸치천 부장이 김일성 주석의 묘향산 별장을 찾았다. 첸 부장은 한·중 수교를 공식 추진하고 있다는 장쩌민(江澤民)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구두메시지를 전했다. 김 주석은 매우 침통한 표정으로 “우리는 자주노선을 걷겠다. 중국이 하는 일은 중국이,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가”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중국은 앞서 4월15일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이 김 주석의 80세 생일 축하행사 참석차 평양을 방문해 “이제는 한국과 관계를 정상화할 때가 가까웠다”고 운을 뗐다. 김 주석은 “수교를 2∼3년만 늦춰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권 전 대사는 “구소련 붕괴 이후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중국이 남한과 수교한다는 통보는 김 주석에게 큰 외교적 고립감을 줬을 것”이라며 “북한은 그때부터 ‘믿을 것은 핵(核)뿐’이라는 인식 속에 핵무기 개발에 매달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북한은 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며 1차 핵 위기를 촉발시켰다.

◆ 대만과의‘단교문서’도 직접 작성해

문제는 대만에 어떤 식으로 사전 통고하느냐였다. 장제스(蔣介石) 총통 시절부터 임시정부 수립과 해외 독립운동, 건국과정에서 많은 빚을 졌던 정부로서는 어떤 해명으로도 ‘배은망덕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일단 대만 정부가 한·중수교에 따른 충격을 수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미리 통고해주기로 했으나 그 시점을 언제로 할 것이냐를 놓고는 정부 내에서도 견해가 엇갈렸다.

당초 권 대사는 한 달 전에 대만에 통보해줄 것을 건의했으나 윗선에서 정보노출 등을 우려해 난색을 보였다. 내부 논의 끝에 정확히 일주일 전에 대만측에 알려주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상옥 장관은 서울 중구 롯데호텔로 진수지(金樹基) 주한 대만대사를 불러 “한·중수교가 불가피하다. 협상을 하고 있으며 수교가 가까이 왔다”고 통고했다. 김 대사로부터 충격적 보고를 받은 대만 정부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정부는 대만이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한·중수교 사실을 대만 정부가 먼저 터뜨리도록 ‘배려’했다. 한·중 수교 이틀전인 8월22일 대만의 첸푸(錢復) 외교부장은 한국의 대중국 수교결정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과 단교한다고 공식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도 대만과의 단교를 위한 실질 작업에 들어갔다. 단교문도 직접 작성한 권 대사는 “최근 당시 작성한 단교문을 읽어봤는데 지금도 여전히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말했다.

◆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리더십
권 대사는 5년 전 베이징에서 조우한 첸 부장이 “덩샤오핑 지도자가 역사적 선견을 갖고 한·중수교의 결단을 내린 것이며 그 결단은 옳았고 지난 15년간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일어나고 있다고 평가했다”며 “그의 평가처럼 덩은 실제로 80년대 중반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에 관심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어 덩은 “1985년 4월 ‘한·중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중국 입장에선 필요한 것’이다. 첫째, 장사를 할 수 있어 경제에 좋을 것이며, 둘째는 한국과 대만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즉 ‘무해양득(無害兩得)’을 언급한 것.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5월부터 9월 사이 덩샤오핑은 외빈을 만나는 자리에서 여러 차례 한·중 관계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중국으로선 한국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게 유익무해(有益無害)하다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경제적으론 쌍방 발전에 모두 유리하고 정치적으론 중국의 통일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한국과 대만의 관계를 단절시킴으로써 도움이 된다).

이런 내용은 첸의 회고록에서도 확인된다. 우리측 예상대로 덩샤오핑이 아니면 책임지고 한·중수교를 밀어붙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중국측 수교 핵심 주역들에 의해 확인된 셈이다.

혜안을 가지고 내다보는 양국의 지도자, 한·중 수교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북방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었고 임기를 1년도 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북방정책의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권 대사는 “모르긴 하거니와 국무총리도 이(한·중 수교를 위한 실무협상) 내용을 몰랐을 거다”며 “당시 한·중 수교 첩보전에 들어가면서 아마 각의도 거치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 국회에도 말할 것도 없고 외교부 내에서도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며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수교 후 한달의 시간이 지난 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중국 정상 방문도 한·중수교 당시 얻어낸 것이라고 권 대사는 말했다.

◆ 中국방장관, 군사협력…“피할 수 없는 외교 안건이죠”

최근 김성환 장관은 중국측에 군사협의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중국측은 이에 대해 특별한 대답을 하고 있지 않은 상황.

이와 관련, 권 대사는 “민감한 부분이라 좀 아껴두자”며 즉답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양국의 발전방향에 대해선 “내가 중국대사로 부임해 당시 탕쟈쉬엔(唐家璇) 외교부장을 만난 뒤 가장 먼저 취하오텐(遲浩田) 당시 국방부장을 만나게 해 달라고 신청했었다”며 “중국의 국방장관은 여간해선 만나기 쉽지 않은데, 만나 관련된 얘기를 나누긴 했다”고 말했다.

권 대사는 당시 취 장관이 “(군사협력은 양국간의) 피할 수 없는 외교 안건이죠”라고 말했다며 더 이상의 언급은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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