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초대석]김병종 서울대 미대 교수·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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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07-2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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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생명’을 그린 30년, 시진핑에게도 통했겠지요?”

김병종 교수가 영인문학관에 전시된 '생명의 노래'  작품앞에서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세구 기자]



"그림·문학 두루 섭렵한 한국적 작가
화첩기행 5권…고전·인문학도 ‘조예’

지리산·섬진강 곁 고향에서 영감얻어
그림의 주제는 ‘생명’으로 일이관지

중국 용틀임은 한국에도 천우의 기회
시진핑 방한 후 중국에서도 작품에 관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을 다녀간지 한 달이 다 돼간다. 중국 국가주석으로서 방한한 이는 그가 처음은 아니었으나, 이번 경우는 한중 양국에 전에 없던 반향을 일으켰다.

시진핑 주석 방한일정의 피날레를 장식한 것이 서울대 강연이었고, 시 주석은 방문 답례품으로 ‘서울대 정문’이라는 그림을 받았다.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 김병종(61) 서울대 미대 교수다.

김 교수는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과 함께 ‘이어령·김병종-생명 그리고 동행’展을 열고 있었다. 이 전 장관의 시와 김 화백의 그림이라는 두 장르가 한 공간에서 어울러 전시되는, 독특한 기획이었다. 전시회의 주제는 ‘생명’이었다.

20여년전부터 중국과 인연

서울대는 시 주석에게 왜 하필 김 교수의 그림을 선물했을까. 영인문학관에서 만난 김교수에게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서울대에서는 예전부터 중요한 손님이나 대학발전에 기여한 분들에게 제 소품을 답례품으로 기증하곤 했습니다. 이번에도 그 연장선상인 듯합니다. 다만, 국빈에게 제 그림이 간 것은 처음입니다.”

김 교수와 중국의 인연은 20여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한국과 중국이 국교수립을 한 이듬해인 1993년 한중 화가들이 ‘한중 미술협회’를 창설했고 김 교수는 부회장을 맡아 양국 미술문화 교류의 물꼬를 트는데 일조했다. 협회는 창립전시회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었고 중국에서도 전시회를 했다. 당시는 중국 장강에 삼협댐이 들어서기 전이었는데 김 교수는 배를 타고 대륙의 속살을 보기도 했다.

김 교수는 30여년간 약 30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국내는 물론 파리 시카고 브뤼셀 바젤 도쿄 베를린 등지에서도 20여회의 개인전을 했다. 중국의 베이징과 상하이에서도 그의 작품은 순회전시됐다. 베이징비엔날레에도 출품했다. 서울대에서 시 주석에게 줄 선물을 고를 때 이런 김 교수의 이력을 감안했음직하다.

정작 선물 증정 때 김 교수는 사정으로 시 주석을 대면하지 못했다. TV를 통해 강연 모습을 지켜봤다.

“시 주석이 미래를 이끌어갈 청년학도들을 위해 대학에 찾아온 것을 높게 평가합니다. 그는 강연에서 한국과 중국의 역사공유를 지적하고 유가적인 인격도야 덕목에도 많은 부분을 할애했습니다. 서구의 지도자와는 달리 온후하고 덕있어 보이는 얼굴에서 한국과 중국이 우러러온 군자의 풍모를 읽었습니다.”

시 주석에게 건네진 그림에는 서울대 정문을 배경으로 두 그루의 적송(赤松)이 얽혀있는 모습이 담겼다. 김 교수는 “추사의 ‘세한도’를 연상하면 된다. 두 소나무는 한국과 중국을 상징한다. 두 나라의 젊은 지성들이 소나무처럼 가교삼아 미래를 이끌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렸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김 교수는 중국이 최근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로 성장한데 대해 당연하면서도 반가운 일이라고 했다. “중국은 유구한 문화유산과 역사전통에도 불구하고 19세기를 전후해 자본주의와 신문물을 앞세운 서구열강의 기에 눌려 엎드리고 있었습니다. 한 세기 이상 주변국에 머무르다가 다시 세계 최강으로 굴기하는 것은, 같은 문화권에 있는 우리에게도 큰 기회가 된다고 봅니다.”

‘繪事後素’-본질이 있은 다음에 꾸며야

김 교수는 화백이면서 동양철학자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후학을 가르치면서도 ‘유가(儒家) 예술 철학’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땄다. 1980년대 후반에는 중국 회화에 대해 연구했고 중국 미술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동양적인 화가라 해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김 교수가 그림(수묵화·채색화)을 그리면서 금언으로 삼는 말은 논어에서 공자가 설파한 ‘회사후소’(繪事後素)다. 직역하면 ‘그림은 흰바탕을 먼저 마련하고 그 연후에 색채를 입혀야 한다’다. 본질(인간 됨됨이)이 있은 다음에 꾸밈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김 교수는 “그림에서도 테크닉보다는 인품이나 인격을 중시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부연설명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그림에는 ‘생명’이라는 지고한 가치가 30년간 일이관지하고 있다. ‘바보 예수’ ‘생명의 노래’ ‘길 위에서-황홀’ ‘회향전’ 등의 연작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시 주석이 돌아간 후 그의 작품을 구입하고 싶다는 전화가 중국으로부터 100여통 왔다고 한다. 신화통신과는 전화로 인터뷰까지 했다.

“중국어가 안돼서 제대로 얘기하지 못했지만 이례적이고 놀랄만한 반응입니다. 한 번 계기가 마련됐으니 중국에서도 전시회를 하려고 준비중입니다. 베이징에 있는 금일(今日)미술관 및 중국미술관과 접촉하고 있지요. 결실이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중국인들에게 선물(예품·예물)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단순한 물건이 아닌,예절과 정을 나누는 마음의 교류로 본다. 그래서 ‘예상왕래’(禮尙往來:예물·예절은 서로 주고받는 것)라는 말이 있다. 요컨대 중국인들은 선물로 만나고, 선물로 친해지며, 선물로 헤어진다. 그것이 그들의 예의다. 김 교수가 시 주석에서 선물을 했으니, 중국에서도 김 교수의 작품을 새로운 관점에서 평가할지 모른다는 기대는 지나친 것일까.

“창작자에게 은퇴는 없다”

김 교수의 고향 남원에는 지리산과 섬진강이 있다. 유소년시절 자연과 함께 지내면서 얻은 자양분이 오늘날 그의 작품 근간이 됐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내 예술세계의 8할은 고향의 생명과 기운,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그의 작품에 대해 “지리산의 부성적 강인함과 섬진강의 모성적 푸근함을 함께 지녔다”고 평가한다.

그에게 교단에서 물러나면(2018년)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하고 나서야 우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그는 “교단만 떠날 뿐, 창작자에게 은퇴는 없다”고 잘라말했다.

남원시에서는 그의 작품을 기리고 보존하기 위해 ‘남원시립 김병종 생명 미술관’을 짓기 시작했다. 8000㎡의 부지(지상 2층, 지하 1층)에 35억원을 들여 전시실·수장고 등을 갖추고 2016년 모습을 드러낸다. 성에 차지 않은듯한 느낌인데도 개의치 않다는 반응이다.

“미술관으로는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작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남원은 춘향전·흥부놀부전 등 구비 문학이 발흥한 곳인데도 제가 자랄 때에는 문화시설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문화에 대한 목마름이 컸지요. 제 작품이 청소년들에게 정서적·미적 체험공간이 되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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