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에 실려 보내는 그 자리엔 그 책들의 주인, 김달진 소장도 있었다. 40년간 끌어모았던 책들. 오른쪽 어깨가 처질 정도로 가방을 메고 모으고 모았던 책들이었다. 착잡한 모습의 주위사람들과 달리 그는 홀가분한듯했다. 김달진 소장은 "더 넓은곳에 가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활용됐으면 한다"며 허허 웃었다.
◇'길 바닥에 쫓겨날까 잠 못 이루는 날' 이젠 끝
조선일보 인터뷰전문 최OO선임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한번도 만난적 없는 김소장의 메일을 받은 최 기자가 그를 만났고 6월23일자로 그의 이야기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금요일의 사나이' 별명을 가졌던…김달진 한국미술정보센터 소장 "3개월 남았네요. 길바닥에 쫓겨날지… 잠 못 이루는 날이 계속되네요"라는 제목으로 그의 이야기가 상세히 실렸다.
"속은 타들어가고 어떻게해서라도 알려야겠다는 마음에 조선일보에 연락한 것이에요. 결국 이렇게 됐지만요." 기사가 나간후 관계자들의 '설레발'은 있었지만 '평생을 바쳐 몰두한 한 개인의 헌신에 대해 정부의 응답'은 없었다.
'김달진이 길바닥에 나앉을판'이라는 소리는 이미 미술계에 널리 알려져있었다. 도움을 주고 싶지만, 도움을 주지 못하는 미술계인사들만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도움을 청했던 조선일보 기사는 극단의 반응을 보였다."전세 보증금이 9억7000만원인데 이중 8억2700만원을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미술계에 일던 측은지심을 넘어서게했다. "그렇게 많은 지원금을 받았다"는 놀라움과 '감당못 할 책 기증하면 될 일이지 욕심을 부린다'는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김 소장도 알고 있었다. "차라리 그만 손떼라는 말도 들었고, 아집은 망하는 지름길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때는 지푸라기라도 힘이 된다면 잡아야한다는 마음밖에 없었다. 대통령빼고 청와대부터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은 물론, 문화예술관련 '높은 분'들은 다 만났다. 그렇게 1년간 다리품을 팔았고 전전긍긍했다.
책들이 쌓여 좁아 터졌던 통의동 건물에서 홍익대 근처에 3개층을 쓰는 건물로 이사오자 '김달진이 건물샀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사왔을때인 2010년, 김달진소장은 훗날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넓은 공간에 책들이 몸을 펴고 자리를 잡은 것만 봐도 행복하기만했다. '무료 열람 서비스'를 하며 문을 연 한국미술정보센터는 4년간의 제대로된 건물에서 화려한 생활을 했다.
전세보증금 8억2700만원 지원은 정말 센 지원금이다. 예술가들의 위한 사업기금운용측면에서 특혜라면 엄청난 특혜다. 은밀하고 위대해진 한국미술정보센터는 유인촌 장관때 시작됐다. 문체부의 예술전용공간지원사업에 선정됐다. 당시 공적자금이 들어가니까 이 건물이 전세인데도 감정평가를 했다. 건물주는 화가 최영욱씨다. 전세보증금이 9억7000만원이라는 감정이 나왔고 정부에서 8억2700만원을 지원했다. 그는 "전세금만 지원을 해준거다. 나머지 1억4300만원은 자부담해서 들어왔다. 또 인테리어비용만 7000만원이 드는등 건질수 없는 큰 돈이 그대로 날라간셈"이라며 "연구소 사무실은 월세 220만원을 냈고, 한국미술정보센터운영도 공과금 인건비등은 자비로 운영했다"고 말했다.
◇"4년간 혜택 감사..3층짜리 오래된 건물 구입 수리중"
"다 끝난 상황인데 이런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그동안 서운했고 답답했고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끈을 놓을수 없었던 건 쫓아다니며 매달릴때마다 들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박원순시장은 그의 희망이었다. 박 시장이 서울시 직원에 300평짜리 건물지을 곳을 알아보라고 했고, 또 노원구 공릉동에 짓는 박물관에 들어갈수 있게 하라는 말에 들뜨기까지 했다. 하지만 1년이 되도록 그 말은 허공에서 맴돌았다. 하루하루 다가오는 보증금 반환일을 당해낼수없었다. 기대감이 실망으로 돌아선 순간, 그는 "지원도 받아봤지만 영구적일수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런 자료들이 김달진 개인의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건 이기적이었다.
"욕심을 버려라"는 말이 마음을 울렸다 "그래, 많은 사람이 보게하자".더 이상 정부지원금을 움직일수 없는 상황속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책들을 기증하게됐다. 9월말 정부의 지원이 끊긴 한국미술정보센터는 문을 닫았다.
김 소장은 "지나고 보니 모든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더 크다"고 했다. 낙담은 또다른 탈출구를 찾는다. 셋방살이 설움을 끝내고 3층짜리 오래된 건물을 매입했다. 한국미술정보센터는 문을 닫지만 '김달진 미술자료 박물관’은 살아있다. 김달진미술연구소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현재보다 규모를 축소해 오는 11월 서울 종로구 홍지동으로 이전, 기존처럼 운영한다. 현재 책들을 무너지지 않게 하기위해 철근공사를 튼튼히 하고 있다. "그동안 버린 인테리어비용등만 모았어도 작은 공간을 샀을거에요. 하하"
◇'초록색 바지 입은 사나이'로 변신 "내가 이기적이었다"
변한건 그때부터였다. 얽매인 과거를 조금씩 놓으면서다. 회색 양복바지에 흰 와이셔츠, 검은 가방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다. 초록색바지에 꽃무늬가 그려진 셔츠를 입었다. 사람들은 "이게 웬일이냐"며 놀라워했다.
"초록색 바지를 사들고 들어가니 아내도 깜짝놀라더라고요." 책을 기증한 후 헛헛했다. 평생 안가보던 백화점에 갔다. 양복 바지하나 사려고 갔는데 15만원이나 했다. 가판에서 파는 바지에 눈이갔다. 양복바지보다 훨씬 값이 저렴했다. 그렇게 집어든 바지가 초록색이었다.
"주위에서 이상하게보는 시선도 느껴졌지만 기분이 가벼워졌고, 취미도 없이 그동안 왜 이렇게 살았나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아내가 그러더군요. "당신은 웃고만 다니라고. 세상사람들이 다 도와주려고 하는데 왜그러느냐고." 돌아보니 "내가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적 자료모으는게 천직이라고 여겼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일당 4500원 '일용 잡급'으로 채용됐어도 행복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별정직 7급, 3년 계약직으로 일했다. 이후 김달진은 '금요일의 사나이'로 유명해졌지만 직장은 고민이었다. 계약직 이후 나가든지 기능직 10등급을 다시 하던지 선택해야만 했다. 10등급은 당시 타자수 방호원이었다. 응어리가 커졌다. 미술계에서 인정받고 있는데,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원망이 커졌다. 더욱이 아들의 약값이 문제였다. 왜소증으로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였다. 1996년 국립현대미술관을 떠나 민간화랑인 가나아트의 자료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랬는데, 아들때문이었는데 내가 잊어버리고있었더라고요." 또래아이들보다 2~3살이나 어려보이는 아들이 어느새 훌쩍 해병대에 입대한다고 했을때도 무감했다. "내가 얼마나 무심한지 그런 아들한테 면회한번 안갔어요. 자료일이 아니면 정말 신경을 안썼었어요."
짠한 마음이 서로 교류하고 있을때, 그가 다시 화색이 돌았다. "이 티켓보세요.이 티켓하나에 읽어낼수 있는게 얼마나 많은지…." 수많은 전시 티켓이 다닥다닥 붙은 파일을 넘기며 그가 또 말을 이었다. "티켓에는 그 전시의 대표작이 나오잖아요. 그림을 알수 있죠. 또 타이포와 입장료의 변화까지 흐름을 알수 있어요. 그래서 가치부여가 중요해요. 자화자찬같지만 내가 우리나라 미술계에 엄청난 일을 해주는거에요. 피카소 전시가 29번이 열리고 연표가 만들어진건 다 이 자료덕분이에요.흐흐흐"
“미술가들에게 남는건 사진과 자료와 책자들입니다. 이런 자료들이 잘 모아지지 않는다면 한국미술사를 어떻게 쓸 수 있겠습니까. 왜 자료를 모으냐고요?. 오늘의 정확한 기록이 내일 정확한 역사로 남는다는 말을 저는 명심하고 있습니다.”
환갑의 나이에도 그는 소년같은 웃음을 보였다. "누가 묻더군요. 왜 후계자를 안키웠냐고. 디지털시대에 언강생심이죠.그건 하라고 해서 될일이 아니에요. 자기가 좋아서해야지."
"어릴적 어른들이 신문쪼가리 모아서 먹고 살겠냐고 했지만, 이 덕분에 살았잖아요. '걸어다니는 미술사전' 별명도 얻고 유명해져 언론에도 나오고, 도덕교과서에도 나왔으니 성공한 것 아닌가요?. "
이걸 어찌해야 할지 버리자니 아깝다며 누렇게 변한 신문 스크랩을 그의 가슴에 끌어안았다. "어쩔수 없는 병이에요.병"이라며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어휴 이사가려면 또 이 짐을 어떻게 싸야할지 벌써부터 걱정이에요. 흐흐흥~"
▶김달진 관장=김관장이라는 직함보다 ‘걸어다니는 미술 사전’으로 유명한 그는 작가·평론가들 프로필은 물론 미술의 미자, 옆구리만 찔러도 정보가 쏟아지는 ‘미술 자료 박사’다. 중학생때부터 상표 담뱃갑 기념우표등을 수집했다. 이후 여성잡지등에 실린 세계명화 화보를 떼내 미술스크랩을 시작햇다. 미술평론가인 이경성)1919~2009)씨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됐다는 뉴스를 보고 편지를 썼다. 자료 스크랩북을 싸들고 가 큰절을 하며 청소부라도 좋으니 미술관에서 일하게해달라고 사정했고 1981년 고졸출신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국립현대미술관직원이 됐다. 화가들의 인명 카드 정리와 자료집관리를 맡아 일하며 전시팸플릿과 도록을 수집, '걸어다니는 미술사전'이라는 사람으로 유명해졌다. 2000년대 김달진미술연구소를 설립했고 온라인 ‘달진 닷컴’으로 진화했다. 또 발품팔아 만든 월간 '서울아트가이드'를 발행한다. 1850년 이후 출생한 한국 근현대 미술계 인사 4909명을 총정리한 <대한민국미술인 인명록>을 비롯해 <한국현대미술 해외진출 60년> <외국미술 국내전시 60년> <한국미술단체 자료집>등을 발간했다. 2008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열었다. 1999년에는 한국지식인 선정, 2008년 예술문화상공로상, 2010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아카이브협회를 창립 회장직을 맡고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