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화장’(제작 명필름)까지 53년 동안 102편의 영화를 연출, 한국영화계의 한 획을 그은 임권택 감독을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소격동 카페에서 만났다.
‘화장’은 죽어가는 아내(김호정)와 젊은 여자 부하직원 추은주(김규리) 사이에 놓인 한 남자 오 상무(안성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처음에는 해외에서 이렇게 반응이 클 줄은 몰랐다”면서 “베니스 영화제 등 17곳의 세계 영화제에 출품됐는데 시사회 반응이 컸다”고 회상했다. 그동안의 작품과는 결이 다른 작품을 연출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동안 작품들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죠. 예전에는 한국 역사의 수난사를 배경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죠. 한국의 그림, 판소리 등 주로 한국 문화가 가진 개성을 영화에 담고자 했는데, 달라지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 역시도 지루할 정도로 어떤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죠. 그럴 기회가 안 왔다는 말도 맞을 것 같은데, 이번에 김훈 선생의 소설을 보면서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다뤄보자’고 생각하며 만들었습니다.”
“젊고 아름다운 직원에 향하는 갈망, 아내에게도 신경을 쓰면서 생기는 정신적인 앓음이 부딪히죠.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그런 정신적인 쏠림 현상을 찍으려고 했어요. 오상무의 내면을 표현하고 싶었죠. 갈망과 현실, 이런 것들을 찍어 냄으로서 우리가 살면서 드러내기 어려운 부끄러운 것까지 포함하고 싶었어요. 김훈 선생의 문장은 그런 유혹을 갖게 하죠. 힘이 있는 문장을 영화로 담아낸다는 게 힘들었어요. 수렁에 빠진 느낌이었죠. ‘삶’ 자체의 사실감을 충실하게 드러내야한다고 스스로 되뇌었죠.”
임권택 감독은 김호정의 샤워신을 영화 인생에 있어 최고의 장면으로 꼽았다. 간병인이 없는 상황에서 안성기가 김호정의 몸을 씻겨주는 장면이다.
“부인의 입장에서는 남편에게도 보이기 싫은 치부였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는 장면이었다”는 임 감독은 “김호정은 아내의 입장에서 충실한 연기를 해줬다. 고된 병간호를 요구하는 장면은 앞선 두 사람의 삶과, 뒤에 이어질 생활을 관통하는 신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런 중요 신을 한 컷에서 해낼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성과였어요. 연기를 위해 점점 말라가는 김호정을 보면서 걱정이 되기도 했죠. 밥을 거의 먹질 않았어요. 다들 밥을 먹을 때 채소 위주의 식단을 유지하는데, 저러다 못 일어나면 어쩌나 싶을 정도였어요. 사실 ‘화장’을 통해 김호정이란 배우를 처음 만났는데, 연기력을 갖춘 배우라고만 알았지 어떤 연기자인지 깊이 몰랐죠. 샤워신은 원래 상반신만 촬영하기로 했다가 전신 촬영으로 바뀐 장면이었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치부지만 아름다운 삶을 동시에 드러내기 위해서 김호정 배우를 설득했죠. 촬영 후 모니터링을 하는데 삶과 죽음이 동시에 드러난 장면이라 매우 만족했죠. 김호정 배우도 ‘아름답다’고 했어요.”
“젊었을 때는 20일 만에도 영화를 만들어내곤 했는데 이제는 늙어서 힘들어요. 충분히 쉬었다가 다시 ‘영화’ 해야죠. 늙어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영화에 미치는 겁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53년째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임권택 감독의 말이라 더욱 크게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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