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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택시 2대로 시작한 정도경영...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 31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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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6-1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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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

아주경제 이소현 기자 = 오는 16일은 육상운송에서부터 항공운송까지 우리나라 선진운송의 초석을 다진 고(故)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가 세상을 떠난 지 31년이 된다. 현재 그룹의 이름으로 쓰이는 ‘금호(錦湖)’는 고인의 아호다.

지난 1984년 작고한 금호는 광복 직후인 1946년 중고택시 2대로 운수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17만원의 자본금 시작한 ‘광주택시’가 오늘날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토대였다. 

버스운수업으로 사업을 확장해 1948년에 ‘광주여객’을 세워 국내 최대의 여객운송업체로 올려놓았다. 현재 고속버스업계 1위인 금호고속의 시작이었다. 최근 금호의 삼남인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제2창업’을 기치로 내걸고 그룹을 재건하고 있다. 3년 만에 금호고속을 4150억원에 재인수하면서 “그룹 재건의 첫 단추를 끼웠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금호고속이 그룹의 모태로 상징성이 크기 때문이다.

여객운송업의 성장은 출발부터 철저한 예방정비와 승객들에 대한 친절한 서비스가 한몫했다. 고객만족 정신을 일찌감치 실천한 것이다. 유석종 전 금호고속 부회장은 “손님이 정류장에서 막차나 배차 간격이 긴 버스를 놓친 경우에는 임사차편이라도 마련해서 손님의 불편을 도우라고 하셨다”고 회고 한 바 있다.

운수업을 시작할 당시 금호의 나이는 46세였다. 해방 이후 당시로선 노인 취급을 받고 은퇴할 만한 나이였지만 뼈아픈 실패들이 밑거름이 됐다. 금호는 1901년 7월 5일 전남 나주 빈농에서 태어나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 2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였다. 쌀 장사·일본행 실패, 고리대금업 포기 등 거듭되는 좌절도 불구하고 반전을 이뤘다. 금호의 기업가 정신을 높고 ‘집념과 도전의 역사’라고 칭하는 이유기도 하다.
 

금호고속의 전신인 광주여객자동차 주식회사의 모습[사진=금호아시아나그룹]


1950년대 말 여객사업은 승승장구했지만 타이어 수급이 힘들어졌다. 1960년 금호는 광주여객의 타이어 품귀난을 해결하기 위해 금호타이어(전 삼양타이어)를 설립했다. 생산 초기 하루 20본 정도의 타이어를 생산했지만 조금만 가도 퍼진다고 해서 ‘호박타이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을 만큼 시판은 엄두도 못 냈다. 그러나 전문기술자를 영입하고 꾸준히 설비를 개선한 결과 5년 만에 KS마크를 획득했다. 이후 군납업체로 지정, 태국에 200본 수출 등 매출신장의 기회를 늘려나갔다.

1972년 ‘금호실업’을 설립했다. 금호실업은 금호타이어, 광주고속(현 금호고속), 전남제사, 한국합성고무(현 금호석유화학) 등의 주식 100%를 거머쥔 명실상부한 지주회사의 틀을 갖추게 됐다. 금호실업은 계열사 통합관리를 위해 ‘투자사업부’를 설치해 신규사업 추진을 담당했다. 또 그룹 공채사원 보집과 교육 등 전반적인 인력관리, 경영실적 평가 등을 수행했다. 1973년 그룹 출범 당시 6개 불과했던 계열사는 4년만에 12개로 늘어났다. 특히 고속버스와 타이어 부문은 급성장해 1970년대 업계 선두로 부상했다.
 

1973년 그룹체제로 출범한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인천 회장(중앙)이 지주회사인 금호실업이 위치한 서울 종로구 관철동 43 삼양빌딩에서 그룹 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사진=금호아시아나그룹]


금호의 지인들은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우선으로 했던 기업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금호는 “좋은 일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뜻으로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몸소 실천해 금호고등학교 설립 등 육영사업으로 사회환원을 확대했다. 김정수 전 금호고등학교 교장은 “모자라는 돈은 사재로까지 메워가면서 학교를 세울 정도로 교육에 대한 사명감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금호는 영화나 창극, 연극을 즐겼는데 당시 문화예술이 대중화 되지 않았던 점을 아쉬워해 관련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금호가 1977년 설립한 문화재단은 40여년간 예술영재와 신진 예술가 지원해 1000여명의 음악인을 배출했다. 금호의 예술지원에 대한 큰 뜻을 이어받아 아들인 고(故) 박성용 명예회장에 이어 박삼구 회장까지 한국메세나협회장을 맡으며 ‘한국의 메디치가(家)’의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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