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人100言]신격호 “나는 운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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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1-12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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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경제의 기적을 이끌어낸 기업인들의 ‘이 한마디’ (8)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자[사진=롯데그룹 제공]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파친코 사업을 해 보는 게 어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패망국 일본에 남아 새 사업을 모색하던 신격호에게 주변 인사들은 이런 건의를 했다. 당시 사업수완이 있다 싶은 재일교포들이 파친코 사업에 몰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격호는 단호히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운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 벽을 쌓아올리듯 신용과 의리로 하나하나 이뤄나갈 뿐이다”

롯데그룹 창업자인 신 회장은 1922년 경남 울산 산골인 울주군 삼남면에서 5남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을 이기기 위해 19세가 되던 해인 1942년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입국 다음 날부터 우유배달을 시작했다. 문학도를 꿈꾸던 그는 생각을 바꿔 와세다공업고등학고(현 와세다대학 이학부) 야간부 화공과를 졸업했다.

고학으로 어렵게 생활하던 신 회장이 전당포를 운영하던 하나미쓰라는 노인의 밑에서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던 때였다.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 본 하나미쓰옹은 그에게 군수용 커팅오일(기계를 연마하고 자르는 데 사용하는 선반용 윤활유) 사업을 해보라며 6만엔을 투자했다. 당시 일본 직장인 평균 월급이 80~100엔이었으니, 6만엔은 20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1944년 신 회장은 도쿄 아오모리에 공장일 빌려 사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공장을 가동하기도 전에 미군기의 폭격을 받아 파괴됐다. 하나미쓰옹의 도움으로 하이초지 부군에 새 공장을 마련해 제품생산까지 해냈지만, 또다시 미군기의 공습으로 완전히 불타버렸다. 사업자금 6만엔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은 채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았다. 친구들이 귀국하자고 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자신을 믿어준 하나미쓰옹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신 회장은 1946년 5월 도쿄 스기나미구 소재 군수공장 기숙사 자리에 ‘히까리특수화학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비누와 포마드 등의 화장품류를 생산했다. 당시 일본은 생활필수품이 귀해 생산한 제품은 출하되자마자 순식간에 팔려 나갔다. 사업시작 1년 반만에 6만엔이라는 거액의 빚을 갚고, 집도 한채 선물했다.

신 회장은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1948년 종업원 10명과 롯데를 설립했다. 껌으로 시작한 사업은 초컬릿, 비스킷,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진출로 이어졌고, 연이어 성공했다. 1960년대 말에는 일본 과자업계 명문이던 메이지와 모리나가를 추월해 일본 제1의 종합제과 메이커가 됐다.

신 회장은 일본 성공의 결실로 고국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1967년 한국에 진출해 롯데제과를 설립한 신 회장은 1973년 정부의 해외자본 유치 정책에 부응했다. 이어 1979년과 1980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한국경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1997년 IMF외환위기 사태 때에도 한국에 대한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또 한국사업에서 번 돈은 한푼도 일본으로 송금하지 않고, 전액 재투자했다.

전문가들은 신 회장의 기업가 정신에는 “빚과 은혜를 갚고야 마는 정직함과 성실함이 깔려 있다”고 말한다. 신 회장도 주변사람에게 가끔씩 “다른 사람에게 페를 끼치지 않는 것이 나의 철학이고, 실패해도 빚을 돌려줄 수 있는 범위내에서 투자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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