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서 통일신라 후기 관청 추정 건물터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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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3-31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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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흙으로 만든 벼루 50여점 등 토기, 기와류 다수 발굴

3m 깊이로 판 경주 월성 유적지 발굴 구덩이. [사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아주경제 박상훈 기자 =‘경주 월성’(사적 제16호)에서 관청들로 보이는 통일신라시대 후기 건물터 14기가 확인됐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심영섭, 이하 연구소)는 30일 월성 발굴조사 현장에서 설명회를 열고 "지난 1년간 발굴조사를 한 결과 월성 중심부인 C지구에서 한 담장으로 둘러싸인 동서 51m, 남북 50.7m 규모의 정사각형 형태 부지 안팎에서 모두 14기의 건물터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경주 월성 C지구에서 출토된 흙으로 만든 벼루 조각들. [사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건물터에서는 흙으로 만든 벼루 조각 50여점이 출토됐다. 황룡사지 동편 구간 24점, 분황사 14점, 계림 북쪽 건물지 등에서 11점이 나온 것과 비교하면지금까지 경주 일대에서 나온 벼루 조각 중 가장 많은 양이다. 이종훈 연구관은 "왕실 문서를 작성했던 사무공간인 것으로 추정된다"며 "건물의 정확한 용도를 알려면 명확한 문헌조사가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소 측은 "건물과 담장의 건축 시기는 인화문(도장무늬) 토기 등으로 미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된다"며 "담장과 건물 6개동을 먼저 지었고, 이후 공간 확보 등을 위해 한쪽 담장 일부를 허문 뒤 건물 8동을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벼루 조각 이외에도 토기와 기와류 등도 대거 발굴됐다. 그 중 '전인'(典人) '본'(本) '동궁'(東宮) 같은 명문이 새겨진 것들이 있는데, 전인은 궁궐 부속관청으로 기와나 그릇 생산을 담당한 와기전의 실무자, 본은 신라 6부 중 하나인 본피부 그리고 동궁은 태자가 거처하던 궁궐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된다. 
 

C지구에서 확인된 일곽의 건물지군의 모습.[사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고고학계가 주목해온 월성 발굴조사는 지난해 3월부터 4개 구역(A~D지구)으로 나눠 진행되고 있다. 연구소는 "지난 1년간은 C지구를 중심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며 "올해는 C지구에 이어 A지구의 성벽, 성벽 바깥 해자에 대한 조사도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고고학자이기도 한 심영섭 소장은 "(발굴 과정에서)유적 파괴는 절대 없어야 한다"며 "연 1회 정도 세미나를 열어 발굴 성과를 확인하고 향후 조사 방향을 잡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조사는 고고학 발굴 원칙에 입각해 신중하게 진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라의 궁성인 월성은 서기 101년 파사왕 때 쌓기 시작해 935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대대로 왕이 기거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일본 고고학자들이 처음 발굴을 진행한 후 100년 만인 지난 2014년부터 경주의 역사정체성을 규명하고 대통령 공약 사항인 '경주 역사문화 창조도시 조성' 차원에서 국내 연구진의 발굴이 본격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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