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10]13세에 사기 통독···학문에 대한 열의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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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6-21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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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10)

  • 제1장 성장과정 (5) 서당 공부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당시의 많은 유복한 가정의 아들들이 그랬듯이 어려서부터 마을 앞 임고서당(臨皐書堂)에서 천자문(千字文)을 비롯한 ‘동몽선습(童蒙先習)’, ‘소학(小學)’, ‘사서삼경(四書三經’, ‘사기(史記)’ 등을 배웠다.

목당의 부친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은 아들들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던 만큼이나 엄하게 키웠다. 그는 자신이 20대에 초시(初試)에 등과(登科)한 것을 늘 아들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면서 그들도 커서 큰일을 하는 사람이 되도록 늘 일렀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매사에 열심이었고 자신과 열정을 가지고 소신껏 일하였다.

이런 영향을 받으며 자란 목당은 늘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공부에 열중하였다. 목당은 뒤에 서도(書道, 문자를 심미적 대상으로 쓰는 특수한 예술)도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어려서부터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인 나머지 얻어진 것이다.

원래 송호(松湖) 이기모(基模)의 집안은 14대조 문한당이 목골에 임강서원(臨崗書院)을 세운 일이 있었으나 대원군이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을 내림으로써 없어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서원이 있는 마을에 살다가 목골로 이사하면서부터는 목당은 독선생(獨先生, 한 사람 또는 정해진 몇 사람의 공부를 혼자서 맡아 가르치는 선생)을 두고 심곡제(心谷齊)나 문한당(文閒堂)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게 되며, 그가 장가를 드는 13세경에는 이미 ‘사기(史記)’마저 통독(通讀)을 끝냄으로써 그 후로는 처가(妻家)에까지 수소문하면서 스승을 스스로 찾아 다녔다.

여기서 목당의 한학 수업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송호정(送湖亭)이라 하겠다. 송호정은 석와가 선친 송호를 추모하여 송호가 타계하던 해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3년 여의 역사로 이루어진 학문과 풍류를 위한 정자다. 살림집과는 별채로 규모와 양식은 전래(傳來)의 전통을 따랐으나 정자의 방향은 정남항으로 석주(石柱, 돌기둥) 위에 누각을 올리고 그 누각 주위에는 폭포수가 쏟아지는 멋진 광경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지었던 것이다. 살림집도 바깥채 두 동, 안채에 두 동으로 각각 돌담을 둘러싼 작지 않은 규모로서 당시의 영천 고을에서는 최고의 건물이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이곳에서 학문을 닦던 목당은 뒤에 영국 유학에서 돌아와 선친이 쓰던 사랑채를 물려받아 쓰면서 좀 더 멋진 정원을 꾸미고, 서고(書庫)를 더 짓고 값비싼 서(書)·화(畵)·골동품(骨董品)을 수집하여 더욱 훌륭한 송호정을 꾸며 놓음으로써 영천의 명물이 되었으나 해방 뒤 대구 10월폭동 때 폭도들에 의하여 완전히 불타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목당은 어려서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아무런 근심 없이 학문에 열중할 수가 있었고 티없이 자라나면서 고매한 인격 형성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유서 깊고 전통 있는 고장일수록 그 고장 특유의 고유한 역사적 향기를 지니게 마련인데 영천은 안동과 함께 더욱 그러한 면에서 두드러진 곳이어서 훌륭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영천에서 24대를 살아온 목당가(牧堂家)만 해도 그들만의 제당(祭堂, 제사를 지내는 당집)을 가지고 있어서, 집안의 소년들이 제당을 서당으로 삼아 학문을 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제당의 이름은 심곡제라 했는데 지금 걸려있는 편액(扁額, 건물이나 문루 중앙 윗부분에 거는 액자)은 목당의 친필이다. 목당은 이곳에서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여 보현사(普賢寺)와 묘각사(妙覺寺), 풍림사(風林寺) 등의 절간을 찾아다니며 심신을 단련하고 인격을 닦기에 열중하였다.

목당가의 가훈(家訓)은 특별히 정한 것이 없었는데, 그것은 이 고장에 향약(鄕約)이 엄존한 데 있었는지 모른다. 한 가지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목당의 집안은 대를 내려오면서 결코 첩실(妾室)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의 양반사회에서는 정첩소박(正妾蔬薄)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첩실을 두는 것을 큰 허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목당의 집안이 대대로 첩실을 두지 않은 것은 이 고장의 향약을 존중한 데서 연유한다고 보겠다.

목당의 출생지인 양향동의 정확한 향약은 알 수 없으나 이웃하고 있는 동부동 망정리의 망정향약(望亭鄕約)은 지금부터 3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 근방 마을의 향약들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목당을 가장 잘 이해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인 각당(覺堂) 나익진(羅翼鎭, 1915~1990년. 한국산업은행 총재·한국무역협회 부회장 역임)은 목당을 가리켜 군자요 대통령감이라고 했다. 그것은 목당이 이해가 엇갈리는 재계의 경제단체장으로서의 훌륭한 판단과 손색없는 처신을 하는 데 대한 존경심을 말하는데, 그 원천은 학문을 통한 인격도야(人格陶冶)와 향약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던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 참고로 망정향약을 옮겨 보기로 한다.

향약법

1. 덕업상근(德業相勤)·· 인격자질 향상을 위한 수련과 생활을 위한 직업에 힘쓸 것을 권장하고,
2. 과실상규(過失相規)·· 지나친 일이나 실수하는 경우가 없도록 서로 규제하며 주의시키고,
3. 예속상교(禮俗相交)·· 예의 범절과 풍속 규범을 동질화하기 위하여 이를 서로 교류시키고,
4. 환난상휼(患乱相恤)·· 근심과 난리에 부딪쳤을 때는 서로 돕고,
5. 사부진효(事父盡孝)·· 부모를 섬기는 데 효성을 다하며,
6. 교자제이의(敎子第以義)·· 자제를 가르칠 때는 옳음으로 할 것이고,
7. 존경장로(尊敬長老)·· 어른과 윗사람은 공경한 마음으로 높이고,
8. 우애형제(友愛兄弟)·· 형제끼리는 서로 아끼고 사랑할 것이며,
9. 화목린리(和睦隣里)·· 이웃끼리는 서로 화목하게 지낼 것이며,
10. 돈후친우(敦厚親友)·· 친구끼리는 돈독하고 너그럽게 지내며,
11. 대처첩이체(待妻妾以體)·· 아내에게는 예의로 대하고,
12. 접붕우이신(接朋友以信)·· 벗을 상대할 때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하고,
13. 입지이충후(立志以忠厚)·· 마음가짐은 변동이 없고 너그럽게 할 것이며,
14. 행기필공경(行己必恭敬)·· 몸가짐은 반드시 공손하여야 하고,
15. 견선필행(見善必行)·· 착한 것을 보면 반드시 이를 행하며,
16. 문과필개(聞過必改)·· 허물을 들으면 기필코 그를 고쳐야 한다.

위에 보아온 16조항은 모두가 유교의 가르침에서 적출해 낸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목당은 “배운 것은 반드시 실행하여야 한다”는 철학을 지닌 사람이므로 굳이 이런 향약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그의 처신은 일생을 두고 덕행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해방후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속에서 한국무역을 주도하기 위하여 설립된 한국무역협회를 그가 끝까지 훌륭하게 이끌었던 사실이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어려서부터 몸에 밴 군자도(君子道)와 청년 시절 영국에서 익힌 신사도(神士道)는 그를 더없는 덕인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했던 것이다.

목당은 자기가 이사장으로 있던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高麗中央學院)이 경영하는 고려대학교와 또한 연세대학교에서도 명예 박사학위를 받고 나라로부터 세 차례나 공로 훈장을 받았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공로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육영사업과 경제사회 발전을 위해 바친 그의 한평생의 끊임없는 봉사에 대한 한 영예의 보상이었던 것이다. 또한 1982년 10월 84세를 일기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재계에서는 그를 경제단체장(經濟團體葬)으로 모시어 그를 추모하고 그의 업적을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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