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전쟁으로 조국이 초토화되고 그날그날 생활에 쫓기는 수많은 피난민, 그리고 물자 결핍(物資 缺乏)과 통화 증발(通貨 增發)로 뛰는 물가고 속에 유독 무역상인들 만이 이상 경기를 맞고 있었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파괴와 건설이라는 아이러니를 실감하면서 정치가들이 불경기의 돌파구를 전쟁에서 찾는 부도덕에 회의를 느끼기도 하는 것이었다.
전쟁터에서는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하고 하루에도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혼미 상태에 있었다. 유엔(UN)군이 갖고 들어오는 전쟁물자를 상륙시키기 위해 부산 부두에 적재되었던 수출품은 유엔군의 제거명령(除去命令)으로 하여 네 것 내 것 할 것 없이 실어내야 되었고 이들 많은 물자들은 우선 가까운 안전지대인 일본으로 옮겨졌다.
매매계약서도 있을 리 없이 가수출(假輸出)되어 일본의 보세창고(保稅倉庫)로 옮겨져서는 위탁 판매 형식으로 처분되는 것이었다. 판로(販路)가 없어 노적해 놓고 때만 기다리던 중석이 6·25로 세계 철강업계를 자극하여 시세는 부르는 게 값이었고 재고를 고민하던 업자들은 하룻밤 사이에 거상으로 등장하고, 저품질로 판로를 잃어 고민하던 철광석 소유업지 또한 횡재를 하는 판국이었다. 중석·철광석 뿐만이 아니었다. 전쟁 파괴에서 얻어지는 탄피·고철 등 철금속(鐵金屬)이 인기 수출품으로 등장하였고, 더러는 탄피를 녹여 진유괴(眞鍮塊)를 만들어 밀수출하는가 하면 더러는 공장 소개를 빙자하여 제작기계를 뜯어 밀수출하는가 하면 고선(古船)을 끌고 나가 고철로 처분하여 목돈을 쥐는 악덕업자들도 속출했다.
수입되는 물자는 나날이 뛰는 물가로 하루가 멀다고 몇 배씩 뛰었다. 밀가루와 양곡의 이익률을 노려 중석불사건(重石弗事件, 1952년 6월 정부가 중석불을 외국에 팔아 벌어들인 달러를 민간 기업체에 불하하여 밀가루와 비료를 수입하게 하고, 이를 농민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 피해를 입힌 사건)이 발생하는 판국이었으니까.
전쟁 전 유일한 대일 수출물자가 해태였는데, 이는 무역협회가 알선하였던 수출품이다. 이것이 전쟁경기(戰爭景氣)에 들뜬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높아서 우리 업자들에게 돈을 안겨다 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횡재하는 사람에게 절제가 있을 리 없었다. 피난수도(避難首都) 부산의 뒷골목마다 유명 마담들이 고급 요정을 차리고 향락의 불야성을 이루었고 수출업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일본 도쿄 환락가 빌딩에 사무소를 차리고 신형 세단을 사들여 오는가 하면 고급 요정에서 돈을 뿌리는 것으로 호기를 떨었다. 전후(戰後)의 사회타락은 여기서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목당은 전쟁을 치르며 적지(敵地)에 남은 부모를 모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나 마침내 모친과 아우를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 목당은 종교인으로서의 입장이 아니라 한 사람의 도덕인(道德人)으로서 다윈의 생존경쟁설(生存競爭說)에 반감을 느꼈다. 전쟁을 치른 뒤의 도덕의 파괴, 인간성의 파괴가 그는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목당이 피난수도 부산에서 보고 겪은 것은 모두가 극한상황에서 저질러지는 하나의 광기 같은 것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무역업계는 이 난장판 속에서 활기를 띤 유일한 업종이었으므로 협회도 활기 있게 돌아갔으리라 예상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이때는 이미 개척기인 초기 무역기를 지나고 있었으며, 거액의 정부무역 대행업으로 업자들의 비대화(肥大化)와 집권세력과의 개별적인 뒷거래가 싹트기 시작하여 업계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정상(政商, 정치가와 결탁한 상인)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무역협회도 전날의 협회가 아니었다. 이사진 가운데서도 집권세력과 밀착된 업자와 그렇지 못한 업자로 나뉘어지고 집권세력과 유착된 정상들의 발언권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하고 있었으므로 한국무역협회에도 변혁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고 할까. 어쨌든 이런 과정에서 목당은 야당계(野黨系) 인사로 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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