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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경제민주화의 전도사로 불리는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행보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김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박근혜 대통령 대선 공약에 경제민주화를 포함시키면서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당선 후 경제민주화 관련 공약을 외면하자 지난해 4·13 총선에서는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의 삼고초려에 민주당을 도우며 총선 승리 후,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새누리당에서 집단 탈당 후 이달 말 창당을 앞둔 개혁보수신당(가칭)도 신당의 정강·정책에 경제민주화를 넣기로 결정하면서 대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주도권 싸움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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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경제민주화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다. 먼저, 경제민주화의 명문화된 근거는 헌법에서 찾을 수 있다.
헌법 119조 2항에서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라고 명시돼 있다.
지난 1987년 헌법 개정 당시 이 조항의 삽입을 강력한 주장한 장본인이 바로 김종인 민주당 의원이다. 그는 노태우 정부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활동하며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과 폐해를 지적하며 현재까지 경제민주화 전도사로 불리고 있다.
포괄적이고 선언적 성격을 지닌 헌법의 특성상 경제민주화의 개념은 이론영역에서 모호하게 설정되면서 구체적인 현실에서는 ‘아전인수’식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게 중론이다. 이에 보수정당이든 진보정당이든 필요에 따라 경제민주화를 전가의 보도로 활용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각 정당의 정강·정책을 살펴보면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의 정강·정책에 경제민주화가 명시돼 있다. 창당을 앞둔 보수신당도 명문화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실질적으로 경제민주화를 부인하는 정당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이처럼 모든 정당이 이념을 가리지 않고 이를 활용하는 근본원인은 경제민주화가 경제영역에서의 공정성과 형평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국가의 역할과 관련, 시장경제질서 확립을 위해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인정한다. 포괄적인 개념을 두고 각 정당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에 방점을 두면서 이용이 가능한 유용한 수단인 셈이다. 보수정당은 과정에서의 공정경쟁에, 진보정당은 결과의 형평분배에 무게를 두는 식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본지와 통화에서 “경제민주화는 헌법에서 명시된 일반적인 개념으로 어느 정당이 독점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라며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가치에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 정당의 차별성이 생길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개인적으로 출발선상의 기회균등과 과정에서의 공정경쟁, 결과에서의 형평분배 등 3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본다”며 “기회균등에 무게를 두면 보수, 결과에 방점을 두면 진보적인 쪽으로 구분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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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부터) 전성인 홍익대 교수와 김상조 한성대 교수[사진= 홍종학 전 의원 블로그]
전문가들은 이같은 포괄적인 개념의 성격을 지닌 경제민주화가 현실 정치에서 적용되는지 여부는 결국 ‘정책과 법안’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선거를 앞두고 모든 정당이 민생과 서민을 내세우면서 경제민주화를 수사로만 악용하고 폐기처분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경제성장론과 경제민주화가 배치된다는 근본적인 프레임에서 벗어나야만 진정 경제민주화 실현에 의지가 있는지,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수 있는 ‘옥석’을 가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본지와 통화에서 “경제민주화를 구분할 수 있는 대표적인 리트머스 시험지는 재벌통제, 중소상공인 지원, 대기업과 하청노동 개혁을 꼽을 수 있다”며 “재벌통제 법안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결국 삼성을 견제하는 법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표적으로 지난해 이종걸 의원이 발의한 보험업법 개정안과 공정거래법 개정안 등을 통해 재벌 중에서도 막강한 힘을 지닌 삼성을 통제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며 “박근혜 정부에서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고 지키지 않은 상법 개정안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최근 들어 각 정당들은 경제민주화 실천의 바로미터가 될 구체적인 법안 경쟁에 나서고 있는 형국이다.
정우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지난 2일 “촛불민심이 요구하는 각종 개혁 입법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며 “비정규직 최저임금 문제에 대한 전향적 접근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동시에 이현재 정책위의장도 새누리당 자체 상법 개정안 마련 등을 거론하면서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새누리당의 이같은 행보는 ‘안보는 보수, 경제는 개혁’을 내건 보수신당의 출현으로 위기감을 느낀 데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새누리당과 차별화에 나선 보수신당은 창당을 앞두고 연속적으로 정강정책 토론회 열고 개혁입법을 예고하고 나섰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정강정책에는 보수의 핵심적 가치를 담고, 보수의 가치 중 고쳐야 할 개혁과제도 담아야 한다"며 "기존 보수정당이 하지 못한 것을 우리 당이 반드시 이루겠다는 확신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민주화의 원조를 자처하는 민주당도 최근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걸었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내년 대선에서 경제민주화를 이슈화시키겠다”며 "그동안 경제정책이 재벌을 위한 것이라 국민이 소외됐고 국민이 국민으로 대접을 못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 공약을 내팽개쳤지만 민주당은 대선 공약으로 이를 하나씩 펼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경제민주화가 늘 경제성장론과 상충관계 또는 선후관계로 설정되는 프레임에 대해 근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경제성장론으로 경제민주화를 배척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두 개념이 상충관계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며 “이제는 오히려 경제민주화가 성장과 부합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더 나아가 경제민주화를 해야만 성장할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면서 “지난 10년간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실패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보수정권의 경제성장 방식은 규제완화와 투자촉진, 이 2가지로 압축된다”며 “특히 이명박 정부는 노골적으로 기업하기 편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음에도 이전 정권에 비해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현재와 같은 프레임으로 경제민주화 논쟁을 펼치면 순환논리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공허한 논쟁에 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불평등을 감수하더라도 전체가 성장하는 방안과 평등하지만 다같이 못 살게 되는 하향평준화라는 선택지를 던지는 것 자체가 왜곡이라는 지적이다.
김 교수도 “경제민주화와 경제성장론을 상충되는 관계로 보는 정당은 향후 선거에서 승리하기 힘들 것”이라며 “두 개념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세력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세력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 “경제정책의 목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고, 비단 경제민주화만이 전부는 아니다”라며 “결국 대립되는 부분을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성장론과 민주화론을 상충관계로 설정하는 것은 정치인들의 화법일 뿐이다”라며 “현실에서 둘 중 하나만 추진하는 정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재벌개혁은 경제민주화의 출발점”이라며 “그것을 시작으로 경제적 약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등의 삶을 개선하는 게 경제민주화의 본령”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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