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사진 = 은천 시가지]
가을비 속에서 우리 일행을 맞이하는 은천은 과거 칭기스칸의 말발굽 아래 사라져 갔던 그 때의 기분을 아직도 간직한 듯 음울한 분위기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우중충한 날씨 탓에 그렇게 느껴지는 면도 없지 않았겠지만 도시 자체가 전반적으로 활기가 모자란 탓도 있는 듯했다.
중국 땅에 사는 50여 개의 소수 민족 가운데 이곳 영하 회족 자치구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가장 낮은 정도라고 하니 도시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은천 시내는 현대화의 길을 걷고 있는 여타 중국의 도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백만 가까운 사람이 사는 도시치고는 도시의 규모가 다소 처진다는 점이었다.
과거 서하 왕국이 자리 잡았던 이 영하회족자치구에 사는 사람은 630만명(2010년기준), 이 가운데 회족(回族), 즉 이슬람인이 30%, 나머지는 한족과 탕구트족, 몽골족 등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있다.
회족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 오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시대부터였으나 원나라가 들어서면서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몽골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원나라 때는 이슬람 거의 모든 지역 역시 몽골 후손들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인들이 중국 땅으로 들어오는 것이 용이했을 것이다.
중국정부는 지난 1950년대 회족이 많이 사는 이 지역으로 다른 곳의 회족들을 옮기게 하는 이주정책을 펼쳐 회족들이 더욱 늘어나게 되자 1958년 아예 행정명칭까지 영하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로 바꾸어 버렸다.
초기에 중국으로 흘러들어 온 이슬람인들은 언젠가 다시 고향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에도 돌아간다는 의미의 回자를 붙여 회족(回族)이라고 불렀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수 백 년 동안 중국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 두 개의 탑이 하늘을 찌르고

[사진 = 서하 승천사탑]
승천사탑( 承天寺塔), 해보탑(海寶塔)으로도 불리는 두 탑은 서하 왕국의 수도 중흥부가 이곳에 자리하기 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두 탑은 청나라 때 전면적인 보수 작업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시내에는 만날 수 있는 고루(鼓樓)와 옥황각(玉皇閣), 남문(南門)성터 등 과거 유적들도 거의가 명나라와 청나라 때 만들어진 것들로 서하 왕국 시대의 것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사진 = 서하문자로 된 불경]

[사진 = 서하 유물(서하 박물관)]
▶ 황량한 들판에 자리한 서하 왕릉

[사진 = 서하 왕릉]
역대 서하의 군주들과 그 신하들이 잠들어 있는 곳, 그 서하왕릉은 은천 시내에서 10여 킬로미터 벗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낟가리 모양으로 흩어져 있는 황토 빛 봉분들 , 바로 과거 서하를 다스렸던 군주들이 잠들어 있는 왕릉이었다.
동서 10㎞, 남북 4㎞에 이르는 황량한 들판에 8개의 봉분이 조금씩 떨어져 무리 지어 있었다. 왕이 잠들어 있는 낟가리 모양의 큰 봉분은 사각형 또는 원통 모양을 한 작은 봉분들로 둘러 싸여 있었다.
주변의 봉분들은 가신들의 순장(殉葬) 묘로 모두 240여 개에 이르고 있다. 가까이 다가서서 본 왕릉의 크기는 높이가 10미터 이상이 될 정도였다.
그래서 서하왕릉을 ‘동방의 피라미드’로 부르기도 한다. 왕릉 터는 간간이 잔풀이 나 있을 뿐 대부분 모래와 자갈들로 채워져 있어 고비사막에서 본 초원과 비슷했다.
서하왕국의 시조 이계균의 능과 2대 이덕명의 능은 서쪽 끝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두 개의 왕릉은 훼손이 심하지 않았으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훈신들의 묘는 대부분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거나 한쪽 편이 무너져 내려 보기가 흉했다.
서하왕릉의 묘는 칭기스칸의 2차 서하 침공 때와 그 이후에 몽골인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데다 지난 60년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당시 홍위병(紅衛兵)들로부터 수난까지 받아 그 모양이 크게 훼손됐다.
특히 옛 것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대포로 왕릉 터에 포격까지 가했다는 것이다. 서하 왕릉이나 은천 시내의 성문까지 그 타파의 대상이 됐던 것을 보면 문화대혁명의 파고가 얼마나 거세게 중국 사회를 덮쳤는지 짐작할만했다.

[사진 = 서하 왕릉의 필자]
그래서 前시대에 대한 부정과 파괴행위는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바로 그 역사의 비정함을 무너진 서하 왕릉 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서하는 첫 번째 칭기스칸의 원정 때는 돌아가는 상황을 읽고 전쟁보다는 비록 굴욕적이기는 했지만 조공을 바치고 길을 내주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후일 칭기스칸의 두 번째 원정 때는 굴욕보다는 저항을 택함으로써 190년 동안 이어져 온 서하 왕조는 종말을 고하고 만다.
칭기스칸이 그의 생을 마감한 곳 서하, 그가 하늘의 부름을 받았던 육반산(六槃山)은 영하자치구 안에서도 경치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곳으로 지금은 삼림공원이 조성돼 있다,
그리고 육반산을 끼고 흐르는 청수하(淸水河)는 황하강 수계로서 칭기스칸은 여기서 숨을 거둔다.
▶ 칭기스칸 사후(死後) 초토화된 서하
서하 땅에서의 칭기스칸의 죽음, 그것은 서하에게는 큰 불행이었다. 칭기스칸의 후계자들은 그가 죽은 땅에 사는 사람들을 살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해 철저히 이 땅을 초토화시켰다.
나중에는 항복마저도 받아 주지 않고 무자비한 징벌을 가했다.
서하가 멸망된 이후 석 달 동안 도시는 불길에 휩싸였고 이곳 왕릉 터는 무덤까지 파헤쳐 지는 이른바 부관참시의 굴욕을 겪었다.
칭기스칸의 아들들은 그것을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의 충견들은 그것을 마지막 충성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 실크로드상의 교통 요충지를 차지하고 주변국에 앞서가는 문화를 만들어 내면서 번영을 구가하던 서하는 역사에 한 점을 찍은 채 사라져 갔다.
이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한 번도 역사의 주역이 되지 못한 채 뒷전으로 밀려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신라왕자 출신 승려가 살았던 하란산

[사진 = 하란산 도로]
하란산은 8세기 중반 신라왕자 출신의 승려 무루(無漏)가 서역에서 도를 깨우친 뒤 이곳 백초곡(白草谷)에 초옥을 짓고 살았다는 곳이다.
내몽골과 영하자치구를 가로지르고 있는 이 산은 산세가 깊고 나무가 무성해 진기한 식물들이 많이 자라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란’이라는 말은 북방지역에서는 준마를 일컫는 말로 실제로 이산의 서쪽 부분은 준마가 달려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 하란산을 가로지르는 만리장성

[사진 = 가욕관 만리장성]
흙으로 쌓아진 성의 대부분은 세월의 파편을 맞은 흔적이 역력하지만 그런 대로 아직은 모양을 갖추고 하란산 아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흉노의 침범을 막기 위해 진시황이 건설을 시작했다는 만리장성, 몽골초원에서 그 흉노족을 계승한 몽골군은 이 하란산의 장성을 넘어 서하 땅으로 들어섰다.
적어도 칭기스칸의 군대에게는 이 만리장성이 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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