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서울시는 2017년 서울 미래유산 중에 꺼벙이도 선정됐다고 밝혔습니다. 꺼벙이는 꿩의 새끼를 부르는 꺼병이가 변해서 생긴 말입니다. 어수룩한 사람을 보고 꺼병이에 비유하다가 생겨난 말인데 왜 꺼벙이가 서울 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걸까요?
1. 70년대 어린이의 절친 꺼벙이
꺼벙이는 머리에 큰 땜빵(백선)이 있고 반쯤 졸린 눈을 한 초등학생입니다. 모자라지만 순수하고 여리지만, 정이 많습니다. 잔머리를 써도 엉뚱한 결과로 돌아오는 꺼벙이 때문에 동네는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꺼벙이는 1970년 아동월간잡지 '만화왕국'에서 명량만화 꺼벙이의 주인공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시절 꺼벙이의 인기는 요즘 인기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 말려'의 짱구나 미국의 '심슨 가족'의 바트 심슨 못지않았습니다.
<만화일기 광고에 꺼벙이, 꾸러기, 뚱딴지, 밤토리, 우야꼬, 등 반가운 이름이 나온다.>
꺼벙이의 인기 덕에 만화왕국 이후 소녀중앙에도 연재되고 90년대에는 만화일기로 출판도 됐습니다. 꺼벙이는 70~80년대 중산층의 생활 모습과 시대적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 당시 어린 독자들은 사고뭉치에 약간은 부족한 꺼벙이의 모습에 즐거워하고 위안을 얻으며 친밀감을 느꼈습니다. 꺼벙이는 어린 친구들의 절친이었죠.
2. 꺼벙이로 명량만화 개척, 묘비명은 육군하사 길창덕
꺼벙이는 고 길창덕 화백(1930~2010)의 손에서 탄생했습니다. 명량만화 개척자인 길 화백은 생전에 자신의 목표를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작품을 그리는 것이에요."라고 밝혔던 만큼 50여 년간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여줬습니다.
그 결과 '꺼벙이', '재동이'. '순악질 여사' 등의 작품이 남았습니다. 길 화백은 문하생을 두지 않고 혼자 원고 작업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원고량이 많은 시기에는 20개가 넘는 원고를 한달안에 마감하기도 했습니다. 왕성한 활동량을 보이던 길 화백은 1997년 폐암 수술을 받고 나서 작품 활동을 중단합니다.
2010년 1월 30일 길 화백은 81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길 화백의 묘비명에는 '육군하사 길창덕'으로 적혀있는데 이유는 그가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은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길 화백 본인 뜻에 따라 묘비명이 결정됐습니다.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의 소용돌이는 길 화백도 비켜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육군 참전용사가 된 길 화백은 직접 전투에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신병 훈련 교재나 유인물들을 그리는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제대 후 본격적인 만화를 그렸습니다. 지금 길 화백은 지금 세상에 없지만, 그가 만든 평범하고 조금 모자란 주인공들은 아직도 우리곁에 함께 있습니다.
3. 더 이상 우리 꺼벙이를 무시하지 마라!
꺼벙이는 서울미래유산 지정되기 전에도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2001년에는 꺼벙이 만화우표 발행과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공로상을 받고 1999년에는 부천 만화정보센터 명예의 전당에 올랐습니다.
현 시점의 어린 독자가 많이 보는 네이버 웹툰 '와라! 편의점'의 지강민 작가는 78화에서 꺼벙이를 오마쥬해서 연출했습니다.
하지만 독자의 어린 연령대 때문에 이들은 꺼벙이의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 했습니다. 당시 반응은 "아 ㅋㅋㅋ이 그림 속담책이나 사자성어 같은 만화책에 나오는 그림"이 많았습니다. 한 네티즌은 "모르는 초딩 : 그림체 바뀜, 아는 척하는 초딩 : 이거 뚱딴지임 ㅋ, 아는 초딩 : 꺼벙이네"라며 한줄 정리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네이버는 지난 2010년 '故 길창덕 화백 추모 웹툰' 페이지를 오픈해 네이버 웹툰 현직 작가들이 릴레이 웹툰을 연재해 길 화백을 추모 했습니다. 당시 최성호 NHN 네이버 서비스본부장은 "국민들의 희로애락을 명랑만화라는 장르 개척을 통해 정서적으로 승화시킨 길창덕 화백의 삶을 기리는 이번 신세대 온라인 만화가들의 추모 릴레이는 감동적이었습니다."라며 "앞으로 신세대 작가들이 길 화백의 뜻을 이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쯤 되면 꺼벙이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될만하겠죠?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