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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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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7-12-2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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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임실의 골칫거리 외팔이를 사살하고 치안을 회복하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감은 불의의 사고로 무주 경찰서장에서 임실 경찰서장으로 부임하게 됐다. 그렇지만 차일혁을 신임 경찰서장으로 맞이하는 임실 군민(郡民)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차일혁을 열렬히 환영하고 나섰다. 전북일보는 차일혁의 임실서장의 부임 장면에 대해 “산악전(山岳戰)의 맹장(猛將)으로 이름이 높은 차일혁 서장이 군수를 비롯한 관민 유지들의 출영(出迎)을 받았다.”고 전했다. 임실서장으로 부임한 차일혁은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군민들을 향해 “빨치산 토벌에 있어서 전 군민(郡民)의 절대적인 협조를 강력히 요청한다.”다며, 신임 경찰서장으로서의 포부를 다음과 같이 다부지게 밝혔다.

“지난 11개월에 걸친 무주에 있어서의 빨치산 토벌의 피어린 체험에 비추어 볼 때, 단지 경찰력에만 의한 빨치산의 완전 절멸(絶滅)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빨치산 준동지구의 전 주민이 확고부동한 정신무장을 가다듬고 최소한도 빨치산의 정보활동을 봉쇄해 버릴만한 조직에까지 그들의 결전체제를 끌어 올려야만 하는 것이다. 앞으로 전 군민과 주야(晝夜)를 불문하고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놈들의 목숨을 완전히 잘라 버리고야 말 결심이다. 절대적인 협조를 거듭 강력히 요청해 마지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임실에 오자마자 차일혁은 부상당한 팔을 걸머멘 채, 쉴 새 없이 빨치산 토벌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 차일혁을 보고 임실 군민들은 그것 보라는 듯 안심하며 마음을 놓았다. 차일혁은 빨치산토벌을 위한 작전계획을 세우면서 무주경찰서에서 제일 먼저 했던 것처럼, 사찰유격대(査察遊擊隊)를 강화시켰다. 임실경찰서에도 사찰계장이 지휘하는 사찰유격대가 별도로 있었으나, 차일혁의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았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은 무주에서 데려온 김용식과 10명의 대원들을 합쳐 사찰유격대를 강화(强化)했다. 그들은 김종원(金宗元) 도경 국장과 최찬택(崔讚澤) 보안과장에게 건의하여 새로 엄선(嚴選)하여 데려온 자들이었다. 그들의 눈빛만 봐도 심중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차일혁은 임실경찰서 서원(署員) 중에서도 과거에 빨치산을 단 1명이라도 사살한 경력이 있는 30명을 새로 선발하여 사찰유격대에 합류시켰다. 그렇게 해서 임실경찰서의 사찰유격대는 기존의 22명에 새로 들어온 30명을 합쳐 53명의 별동대(別動隊))로 강화됐다. 사찰유격대장에는 김용식 경사를 임명했다. 빨치산을 토벌할 막강한 조직이 만들어진 셈이다.

사찰유격대를 대폭 보강한 차일혁은 그때부터 임실지역의 빨치산 토벌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때가 1952년 11월 4일이었다. 정읍군 산내면 방면에서 임실의 회문산으로 이동하는 전북도당 유격대를 발견하여 사찰유격대 1분대장 외 2명이 10분간의 교전 끝에, 사살 1명, 99식 장총 1정, 수류탄 1개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사찰유격대의 전과는 계속됐다. 그 다음날인 11월 5일에는 관촌면 상리지점에서 만덕산 방면의 빨치산 8명 중 1명을 사살하고, M1소총 1정과 실탄 다수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 사찰유격대는 운암면 마하동에서 보급 투쟁하던 빨치산들과 2시간의 교전 끝에 임실군당 선전책과 북한군 패잔병 2명을 사살하고, M1소총 1정을 비롯하여 칼빈 소총 1정과 일제 99소총 2정을 노획했다.

사찰유격대는 연일 전과를 올렸다. 11월 9일에는 지사면 안하리 비트에 숨어있던 군당(郡黨) 책(責)을 생포했고, 11월 10일에는 성수면에서 전주시당 부책(副責)을 사살했다. 11월 11일 새벽 4시에는 사찰유격대 양희근 지휘 하에 운암면 감내골에서 빨치산 6명을 포착하여 2명을 사살하고, 칼빈 소총 2정과 따발총 1정을 노획했다. 그날 20시에는 성수면 지서원 10명이 성수산을 수색하여 전주시당(全州市黨) 당원들을 발견하여 3명을 사살하고, 칼빈소총 1정을 노획했으며, 20시 30분에는 임실군 주을리에서 임실군당 당원 9명을 포착하여 그 중 2명을 사살하고 칼빈 소총 2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사찰유격대는 하루 동안 빨치산 7명과 총기 6정을 노획함으로써 전라남북도는 물론이고, 전국 최고의 기록을 세우게 됐다. 전북일보는 임실경찰서의 그날 전과를 ‘하루에 7명 사살’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했다. 놀라운 전과가 아닐 수 없었다.

사찰유격대는 연일 승전보를 올렸다. 11월 17일 아침 6시에는 사찰유격대장 김용식 외 10명이 삼수리에서 항미연대 2소대장을 생포했고, 양희근이 지휘하는 12명은 신안리 관촌부락에서 식사 중이던 빨치산 4명을 생포했다. 빨치산 출신들이 빨치산을 잡고 있었다. 생포된 빨치산 이기봉은 임실군당 전공대장(戰攻隊長)으로 있으면서 전라선 철로 습격과 차량 습격 등을 20여 회 감행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이기봉은 임실에서 살인(殺人)과 방화(放火)를 자주 저질렀던 악질(惡質) 빨치산이었다.

그런데 김용식이 이기봉을 사찰유격대원으로 편입시키자고 했다. 김용식이 큰 전과를 올리고 있던 터라 차일혁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차일혁은 자신이 부임한 지 10여 일만에 그런 엄청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새로 강화한 사찰유격대원들의 활약이라고 여겼다. 그 가운데서도 차일혁이 무주에서 데리고 온 사찰유격대 대원들과 기존 임실경찰서의 사찰유격대 대원들이 서로 경쟁을 하면서 더욱 좋은 결과를 낳게 됐다. 이는 차일혁 특유의 용병술(用兵術)이었다.

차일혁이 지휘하는 임실경찰서가 연일 막대한 전과를 올리게 되자, 문봉제(文鳳濟) 치안국장과 진헌식(陳憲植) 내무부장관이 임실경찰서를 방문하고, 서원(署員)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금일봉으로 50만환(圜)과 표창장을 전달했다. 차일혁은 금일봉으로 받은 50만환을 옹진반도에서 피난 온 실향민(失鄕民)에게 봉투도 뜯지 않은 채 그대로 전달했다. 천막을 치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피난민들을 보고, 인정이 많기로 이름난 차일혁이 그대로 있지 않았다.

차일혁의 빨치산에 대한 토벌 전과는 연일 언론에 보됐다. 그 결과 임실 내에 준동하고 있던 거물급 빨치산들이 거의 전멸(全滅)했으나, 임실을 중심으로 남원과 회문산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외팔이’는 여전히 건재(健在)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최찬택 도경 보안과장이 임실경찰서를 방문하고, 차일혁에게 ‘외팔이’를 꼭 사살하라는 특명을 내리고 갔다. 그 정도로 외팔이는 이 지역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던 빨치산이었다.

이쯤 되자 차일혁도 외팔이에 대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더 이상 외팔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차일혁도 외팔이를 처단할 작전구상에 들어갔다. 그래서 얼마 전 생포된 이기봉이 사찰유격대에 생포되기 전에 외팔이부대와 몇 번 작전을 벌인 것을 알고, 그를 통해 외팔이의 전술을 파악했다. 외팔이라 부르는 이상윤은 중국 팔로군(八路軍) 출신의 북한군 대위였다. 이상윤은 9·28 수복 후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산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런지 이상윤은 대담하면서 유격전에 능했다.

남원군당 군사부장 겸 항미연대 참모장인 이상윤은 사제수류탄을 실험하다가 부상을 당해 한쪽 팔을 잃었다. 그러나 한쪽 팔을 가지고도 그의 사격술은 뛰어났다. 그는 2번의 기차 습격과 여러 차례의 차량 습격 등을 통해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행동을 보였다.

차일혁 휘하에 들어온 귀순 빨치산 이기봉은 한때 외팔이 이상윤 부대와 합동작전을 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서 이상윤의 전술을 파악한 차일혁은 이상윤을 잡을 작전을 짰다. 차일혁은 이상윤이 주로 활동했다는 나촌면 금성리에 있는 백운산 고개를 작전지역으로 선정하고, 적에게 먹이 감을 던져 준 다음 사로잡는 ‘사적지계(飼敵之計)’를 쓰려고 했다. 이른바 유인작전이었다. 하지만 빨치산이 이를 알아채면, 매복해 있는 아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는 위험한 작전이기도 했다. 빨치산 거물을 잡기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모험에 가까운 위험한 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차일혁은 사찰유격대원들에게 일체의 세수와 면도, 양치질 그리고 담배까지도 금(禁)하게 했다. 빨치산들은 오랜 산중 생활로 후각과 청각이 동물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났다. 그들은 50미터 전방에서도 비누냄새와 치약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차일혁은 그들이 빨치산에게 가까이 접근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사찰유격대원들에게 비누와 담배를 일체 금지시켰던 것이다.

그런 후 차일혁은 상당기간 세수와 양치질을 하지 않은 사찰유격대원 25명을 먼저 작전지역에 매복시켰다. 나머지 사찰유격대원 32명은 중화기와 함께 산중턱에 배치했다. 병력배치가 끝낸 차일혁은 빨치산들이 습격하기 유리한 지점에 보급품이 실린 것처럼 위장한 트럭을, 마치 고장 난 것처럼 꾸며 밤을 새워가며 고치게 했다. 이 작전의 성패(成敗)는 이틀 전에 미리 숨어있는 사찰유격대원들이 발각되지 않은 것이었다. 또 트럭이 고장 나서, 낮부터 밤까지 고치는 척하는 위장전술을 빨치산이 눈치 채지 못해야 했다. 낮부터 차를 고치는 척하던 운전병은 밤이 되자, 허수아비에 군복을 입혀놓고 그곳에서 빠져 나왔다. 새벽이 되자 항미연대의 빨치산들이 차량이 있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 왔다. 순식간에 6~8명의 빨치산들이 트럭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긴장감이 흐르던 그때였다. 임실경찰서 서원(署員) 한 명이 그만 긴장한 나머지, 총을 발사함으로써 빨치산들을 포위하여 사로잡으려던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자 양측은 총격전을 벌이게 됐다. 함정에 빠진 것을 안 항미연대는 위기에 벗어나기 위해 발악을 했다. 맹렬한 사격을 날이 새면서 겨우 멈췄다. 빨치산들이 물러간 트럭 주위에는 3구의 빨치산 시체만 놓여 있었고, 주변에는 선혈(鮮血)이 낭자했다. 주변을 수색하던 중 사살된 빨치산 1명을 더 발견했으나, 생포는 하지 못했다. 더구나 잡으려고 했던 외팔이 이상윤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됐다. 작전을 통해 4명의 항미연대 소속의 빨치산들을 사살했다. 하지만 잡으려고 했던 외팔이를 잡지 못하게 되자, 차일혁의 실망(失望)은 컸다. 유격전에는 병력이 많아 좋을 것이 없다는 말이 맞았다. 25명의 사찰유격대원 외에 본서(本署) 대원들을 투입한 것이 실패의 원인인 듯 했다.

차일혁은 임실 경찰서장 부임 이후 계속된 빨치산 토벌로 관내(管內)를 거의 둘러보지 못했다. 어느 날 임실 면장과 함께 관내를 둘러보는데, 그가 차일혁에게 “생포된 빨치산들 중 이기봉을 어떻게 처리했습니까?”라고 물어왔다. 차일혁은 차 뒷좌석에 칼빈소총을 들고 앉아 있는 이기봉을 가리키며, “이기봉이 저 사람이다.”라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면장은 그만 놀란 나머지 입에 거품을 물며 기절했다. 이기봉은 임실에서 그만큼 악명을 떨치던 빨치산이었다. 그런 이기봉도 차일혁에게 투신하여 빨치산 토벌에 앞장서고 있었다.

빨치산 토벌이 웬만큼 이루어졌다고 판단한 차일혁은 그동안 민원(民怨)의 대상이었던 의경(義警)들의 수를 대폭 줄여나갔다. 또한 전시체제를 병행하면서도 민원을 해소하고, 관내 치안에도 힘썼다. 골칫거리인 빨치산 토벌에는 소수 정예병력을 투입하여 조용히 해결했다. 나아가 솔선수범(率先垂範)의 민주경찰 행정을 통해 군민(郡民)들과 하나가 되고자 노력했다. 이 모든 것이 주민들의 안전과 편의를 고려한 차일혁의 사려 깊은 조치였다.

해가 바뀌어 드디어 1953년 새해가 밝아왔다. 새해에도 빨치산 토벌은 계속됐다. 1953년 1월 3일, 이영석 성수지서 주임이 지휘한 경찰대가 보급투쟁을 하던 임실군당 조직책과 임실군 총책(總責)을 생포하고 소총 2정을 노획했다. 이들을 임실경찰서로 압송하여 취조한 결과, 뜻밖의 사실을 알아냈다. “작년 12월 8일, 차일혁이 외팔이 이상윤을 잡기 위해 덫을 놓았는데, 그때 한 경찰관의 급작사격으로 매복해 있던 경찰과 빨치산 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그때 외팔이 이상윤이 교전 중에 다리에 총상(銃傷)을 입고, 그들의 비밀 아지트에서 치료를 받다가 출혈(出血) 과다로 12월 25일 죽었다.”는 것이었다. 생포된 빨치산은 “이상윤의 가매장(假埋葬) 장소가 성수산 불당골 부근”이라고 진술했다.

그 말을 들은 차일혁은 즉시 오일봉 사찰계장을 불러 이상윤이 매장되었다는 불당골 일대를 수색하도록 지시했다. 3시간 동안의 수색 끝에, 가매장된 외팔이 이상윤의 사체(死體)를 발굴했다. 사체는 땅속 7척의 깊이에 미군 모포 5장으로 싸여 있었다. 이상윤의 사체는 미군용 내의를 입고 있었고, 그가 평소 좋아했던 담배와 담배케이스, 쌀 다섯 말이 함께 들어 있었다. 빨치산들은 외팔이 이상윤을 영웅으로 정중히 장사지냈던 것이다.

외팔이의 사살(射殺) 소식은 금새 전파됐다. 전북 도경에서는 ‘호외(戶外)’를 통해 외팔이 사살을 전 도민들에게 즉각 알렸다. 그때가 1953년 1월 4일이었다. 그러자 각 언론사의 기자들이 이상윤의 사살을 확인하기 위해 임실경찰서로 몰려들었다. 기자뿐만이 아니었다. 전북도경국장 김종원을 비롯하여 미 고문관 힌클 소령, 남부지구경비사령관 이용문(李龍文) 준장, 치안국 전방지휘소장 신상묵(辛相默) 경무관도 임실경찰서로 달려왔다. 그만큼 외팔이 는 그 지역에서 악명을 떨치던 빨치산임에 틀림없었다.

차일혁은 이상윤을 비롯한 임실지역 빨치산들을 소탕한 전공으로 또 다시 금성(金星)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임실경찰서의 경사(慶事)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상윤 사살에 공인 큰 사찰계장과 성수 지서주임은 은성(銀星) 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전 서원들은 치안국장의 개인 표창장을 받았다. 차일혁 서장 이하 모든 서원들이 무공훈장을 받거나 표창장을 받았던 것이다. 경찰사에서 이런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차일혁의 전투지휘가 또 다시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차일혁의 전공에 정치인들도 임실경찰서를 찾아왔다. 1953년 3월 10일, 임실출신의 국회의원 엄병학이 차일혁을 방문했다. 엄병학은 피난민의 비참한 생활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빨치산 토벌에서 뛰어난 전과를 거두게 된 비결이 무엇이냐?” 물었다. 차일혁은 엄 의원에게 “저는 항상 빨치산의 입장이 되어서 빨치산 토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효과적인 작전을 펴곤 합니다.”라고 말했다. 차일혁은 빨치산에 대해 매우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특기 중 하나는 “빨치산으로 빨치산을 잡는 것”이었다. 빨치산을 잡는데 그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었다.

차일혁이 임실경찰서장으로 빨치산 토벌로 기세를 올리고 있을 때, 남한 각지의 빨치산도 서서히 그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1953년이 되면서 빨치산들은 그 수가 1천명 미만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북한으로부터 보급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반경 50km 밖에 안 되는 눈 덮인 산을 헤매며 빨치산 활동을 한다는 것은 세계전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경우에 해당됐다. 그것도 3년 가까이 버틴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산악지형 중에서 그나마 빨치산이 활동하기에 적합한 곳으로는 지리산(智異山) 일대밖에 없었다. 그런 지리산도 지형 특징상 인근지역 주민들의 협조 없이 버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빨치산들은 지리산을 배경으로 3년 넘게 버텼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빨치산들의 활동 초기에는 주민들의 협조가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점차 군경(軍警)의 토벌대에 쫓겨 다니면서 빨치산들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주민들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됐다.

여기에는 군경들이 빨치산과 주민들을 분리시킨 작전도 주효(奏效)했다. 하지만 빨치산들이 한계를 느낀 것은, 결국 도움을 받아야 할 북한으로부터 보급 등을 전혀 지원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빨치산들은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됐다. 이에 따라 주민들을 빨치산들에게 점차 비협조적이 되고, 빨치산들은 그런 주민들을 불신하며 괴롭히게 됐다. ‘물과 물고기의 관계’였던 ‘주민과 빨치산과의 관계’는 깨어지게 됐다. 그 결과 물을 떠난 물고기가 살수 없듯이, 주민이 버린 빨치산은 존재할 수 없게 됐다.

차일혁도 이제 임실을 떠나게 됐다. 1953년 5월 15일, 차일혁은 드디어 총경(總警)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정들었던 임실을 떠나 서남지구전투경찰대 2연대장으로 영전하게 됐다. 차일혁은 남부군총사령관 이현상을 잡으러 지리산으로 향했다. 이현상과의 최후의 결전이 남아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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