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주한 필리핀대사관. 라울 에르난데스(Raul S. Hernandez) 주한 필리핀 대사는 설 연휴를 앞두고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중에도 밝은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지난 2014년 8월 주한 필리핀대사로 부임한 뒤 3년 넘게 이어진 한국 생활은 꽤 만족스럽다고 했다. 갈비탕, 비빔밥 등 음식도 입에 맞았고 한국인 특유의 친밀함도 적응에 도움을 줬다.
오랫동안 이어온 한국과 필리핀의 교류와 협력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양국은 중요한 동맹국 중 하나가 될 것이라면서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에르난데스 대사는 "한국과 필리핀의 미래는 국가와 국가 관계를 넘어 국민과 국민 차원에서 포괄적·다각적 관계 구축을 통해 장밋빛을 보일 것"이라고 자신했다. 에르난데스 대사와 함께 방위·안보부터 무역과 경제, 사회와 문화 교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의 양국 협력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한국은 중요한 안보 파트너··· 인프라 집중 투자 정책은 한국에 기회"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올해 한국을 방문한다면 어떤 메시지를 가장 먼저 남길까. 에르난데스 대사는 일단 한국과 '방위와 안보 관계'를 확대하자는 메시지가 우선순위에 놓일 것으로 내다봤다. 필리핀이 역사적·지리적 특성상 동맹국과의 협상을 통해 안보 개혁을 꾸준히 추진해온 점에 비춰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다만 물류 조달과 인적 교류 등 기존의 협력 체계보다 진일보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방위 협력 측면에서 양국은 그동안 최소 세 가지 이상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사례가 있습니다. 1994년 체결한 국방, 물류 및 산업 협력 양해각서는 선박과 항공기 같은 물자 생산 및 조달 협력을 강조했죠. 2009년 상호 물류 협력 양해각서에는 공동 연구, 물류와 방위 산업 내 인력 교류, 정보 교환, 인도적 지원·재해 구호 및 평화 유지 등의 내용이 담겼고요. 2011년에 맺은 국방 협력 양해각서에서는 정기 대화체 설립, 고위급 장교와의 면담 등을 논의했습니다."
에르난데스 대사는 기존에도 양국 안보 관계가 끈끈했지만 앞으로는 기존 관계의 지속성뿐만 아니라 역량 강화와 물류 지원 등에 있어서 구체적인 방위 협력 강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필리핀 군대의 근대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더 많은 군사 장비를 교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현재의 안보 관계에 비추어 볼 때 국제 테러대응 , 사이버 보안과 국제 해역의 항해 순찰 부문에서도 양국은 보다 폭넓게 협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리핀이 한국을 주요 경제 파트너로 판단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두테르테 대통령은 '인프라 건설' 투자를 기반으로 한 무역 부문에서의 협력 방향도 제시할 가능성이 적지 않아 보인다. 지난 2016년 6월 공식 취임한 두테르테 대통령은 일찌감치 신공항 건설, 철도 네트워크 확대, 항구 개조 등 인프라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명목상으로는 교통 혼란 등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일자리 창출을 통한 경제 활성화를 추구한다는 설명이다.
에르난데스 대사에 따르면 두테르테 대통령은 10단계 사회경제적 어젠다에서 빈곤율을 2015년 21.6%에서 2022년까지 13~15%로 감축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일자리 창출과 자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통해 필리핀 전역의 성장을 촉진시킨다는 복안으로 풀이된다. 2017년부터 2022년까지 인프라 프로젝트에 8조~9조 페소(약 186조 9300억 원)에 달하는 공공 지출을 계획하고 있다.
"필리핀 인구는 1억명 수준입니다. 전체 인구의 평균 연령은 23세로 대규모 생산 노동력 수급이 가능해 필리핀에 진출한 외국 기업에 이점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현재 필리핀에서는 수많은 단기·중기 인프라 프로젝트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한국 엔지니어링 기업과 건설 회사가 기술적 전문성과 자본을 제공한다면 상호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리핀의 목표는 다른 나라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제조업체들에 보완적인 제조 옵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필리핀에서는 인프라 중점 사업을 일명 '빌드, 빌드, 빌드(Build, Build, Build)' 프로그램으로 통칭한단다. 한국 기업의 투자 유치를 준비하는 가운데 지난 1월에는 29일부터 31일까지 사흘간 한국수자원공사, 한국전력공사(KEPCO), GS건설 등 대형 인프라 및 유틸리티 기업을 포함한 한국 기업 12곳이 한·아세안센터(AKC)와 주한 필리핀대사관의 리드 아래 필리핀 현지에 가서 프로젝트 참여에 대한 선행 탐사에 나섰다는 것이 에르난데스 대사의 설명이다.
다만 한국 기업이 투자할 수 있는 분야는 인프라 외에도 전자 및 반도체, 자동차 조립 및 자동차 부품, 전기자동차 등과 같은 제조업 분야에도 다양하다. 뱅킹과 금융, 조선, 애니메이션 및 게임 개발, 농산물 및 식품 가공, 부동산과 관광 시설, 에너지와 신재생 에너지 등도 투자해볼 만한 영역이다. 전기자동차 부문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전기자동차 시장은 일본이나 중국 같은 다른 나라들이 선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혼란스럽지 않기 때문에 접근을 시도하기에 좋은 타이밍입니다. 필리핀은 아세안 시장을 겨냥하는 한국 전기자동차 제조업체의 제조 허브가 될 수 있습니다. 2017년 11월 필리핀 산업자원부가 한국 통상산업자원부와 전기자동차 분야 협력 관련 양해각서를 체결한 것이 의미 있는 이유입니다."
인프라 개발과 정보통신 기술, 환경 보호, 식량 공급, 재생 에너지 등 양국 간 사업 기회 확대가 결국 한국과 필리핀의 경제를 보완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필리핀의 한·필리핀 관계 발전을 향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2015년 8월 5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개최된 한국과의 각료회의에서는 2016-2020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공동 선언 이행을 위한 새로운 실행 계획을 발표했다. 에르난데스 대사는 이렇게 표현했다. "필리핀은 풍요롭고 깨끗한 열대 농업과 해양 자원의 축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국제적으로는 아세안(ASEAN)과 아세안+3의 교각 역할을 하고 있죠. 인프라와 경제 호황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러한 이점들은 한국기업을 포함해 대(對)필리핀 투자를 고려하는 글로벌 기업들에 매력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 "2019년 한·필리핀 수교 70년 준비 만전··· 다문화 가정 지원은 숙제"
올해 주한 필리핀대사관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일정을 소화할 계획이다. 한·필리핀 수교 70주년을 맞는 2019년을 한 해 앞둔 시점에서 필리핀의 숨은 매력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지금도 한국 시장은 필리핀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2017년 1월부터 11월까지 필리핀을 방문한 한국인 방문객은 145만8000여명에 이른다. 강력한 인적 교류는 필리핀과 한국 간 선의와 우정을 증진하고 양국 관계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판단에 따라 홍보 정책을 좀 더 강화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단 필리핀관광청-한국사무소(PDOT), 한-아세안센터(AKC) 등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국제관광회(KOTFA), 부산국제관광전(BITF), 하나투어 여행박람회(HITS), 제15회 대구·경북국제관광박람회, 2018 지구촌나눔한마당, 서울빛초롱축제 등 다양한 관광·문화 활동에 참여할 예정이다. 필리핀 독립 기념일(6월 12일)을 전후해서는 외교 분야 리셉션과 필리핀 커뮤니티 행사를 준비한다. 올해 말에는 부산에서 필리핀 영화제도 개최할 예정이다. "영화제는 필리핀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묘사하는 영화를 공개할 뿐만 아니라 필리핀 문화와 전통을 잘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된다. 일련의 행사를 통해 필리핀 국민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공감을 높이고 필리핀과 한국의 국민 간 상호 이해를 증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에르난데스 대사는 강조했다.
에르난데스 대사는 한·필리핀 간 교류가 대체로 높은 완성도를 보이고 있지만 다문화 정책에 있어서는 아쉬운 점도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필리핀 출신 결혼 이민자는 1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결혼을 통해 이미 한국 시민권을 취득한 필리핀 사람까지 포함하면 더 늘어날 수 있다. 이런 추세는 향후 더 증가할 수 있다. 여성가족부 등 한국 정부의 다문화 가정 지원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국제결혼을 통해 형성된 가족 문화와 다문화에 대한 상호 이해를 증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필리핀 결혼 이민자들은 한국의 다변화, 글로벌 경쟁력 및 경제·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당수가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스며드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양국 간 문화, 관습 및 관행의 차이는 다문화 결혼의 큰 과제입니다. 사전 대처가 필요한 부분이죠. 외국인 배우자뿐만 아니라 양쪽 당사자가 모두 결혼 전 상담이나 서로의 문화에 대한 교육을 받는 것도 이상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에르난데스 대사는 특히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정체성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다문화 어린이를 위한 필리핀어 교실 운영, 이민 결혼자를 위한 포럼 개최 등 필리핀 출신 다문화 가정의 서울 정착을 위해 노력해온 공로를 인정 받아 지난해 서울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은 점차 이질적인 사회로 변모하고 있지만, 국가 내 다른 문화 존중을 고양한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어른 세대로서 우리는 다양성과 포괄성의 개념에 따라 사회의 젊은 구성원들을 교육하는 데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다문화에 대한 정의는 다양한 인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 관행과 가치에 대한 문화 간 존중과 관용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말이죠."
필리핀 정부가 필리핀에 거주하는 약 10만명의 한국인과 연간 100만명이 넘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점도 이런 관측과 일직선 상에 있다. 필리핀 정부는 현재 필리핀에 체류하는 한국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경찰청 등 한국 기관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에르난데스 대사는 "두테르테 대통령은 국방과 무역 외에도 재외 필리핀 노동자의 노동 및 고용 문제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며 "(방한 시) 한국 정부가 2만6000명 이상의 필리핀인에게 취업 기회를 제공해 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데 대해 감사하는 한편 자국 근로자를 위한 노동 및 이민 프로그램 개선 방법을 논의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필리핀이 방위 협력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관습적이기도 하지만 끊임없는 환경 변화에 대응하려는 측면도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2017년 11월 마닐라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필리핀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추구를 위해 한국에 지속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라고 밝힌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남북 단일팀 구성 등의 성과를 낸 평창동계올림픽이 한반도의 평화를 증진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에르난데스 대사의 답변은 명확했다.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가 한반도의 지속 가능한 평화와 화해를 향한 교류와 협력의 기회를 증진시키는 촉매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화와 화해를 위한 기회의 창을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다년간 이어진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이번 올림픽은 '올림픽 휴전(Olympic Truce)' 정신에 진정성을 부여했다고 봅니다. 남북한이 협력을 통해 이번 동계 올림픽을 '평화의 올림픽'으로 만든 노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발전을 바탕으로 우리는 국제 사회의 희망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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