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스타일로 잘 알려졌다. 지난달 출간한 저서 '인프라, 평균의 시대는 끝났다'에서도 그의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이 원장은 "4대강 사업 이후 지난 10여 년간 우리의 인프라 정책은 '완공위주 집중투자'를 원칙으로 하다 보니 축소지향적이었다"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건설산업의 기반이 무너질 뿐만 아니라 해외시장으로 나가기도 어렵고, 인프라 선진국과의 격차도 더 커질 것이란 위기감을 갖고 있다"고 피력했다.
책의 제목은 한 강연을 듣고서 생긴 의문들로부터 착안한 것이라고 했다. 한 정부 고위공무원의 SOC(사회간접자본) 정책방향에 대한 강연이 그것이다. 요약하면 국내 GDP(국내총생산) 대비 건설투자 비중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보다 높고, OECD 국가의 평균적인 추이를 보면 국민소득 1만5000달러를 넘어서며 건설투자 비중이 줄었다. 그러니 우리도 앞으로 줄이는 게 당연하다는 식이었다. 이때 '우리가 목표로 하는 인프라 수준이 OECD 평균인가', '우리가 OECD 국가의 평균만큼 건설투자를 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비약적 경제성장이 가능했을까' 등등의 생각이 이 원장 머릿속에 떠올랐다.
실제 OECD 국가들의 통계를 보면, 국민소득 3만 달러부터는 건설투자가 더 늘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OECD 국가의 평균적인 수준만큼만 인프라에 투자했다면 한국의 압축성장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들은 오랫동안 인프라 투자를 등한시 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원장은 "우리는 OECD 국가 평균이 아닌 질적인 측면에서 세계 최고의 인프라 경쟁력을 가진 나라를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라며 "4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승자 독식의 시대'라고 한다. 이런 시대에는 더욱 평균을 쫓아가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세계경제포럼(WEF)에 따르면, 홍콩과 싱가포르를 지난 몇년간 세계 1~2위의 인프라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했다. 지난 10월 말에 홍콩은 마카오를 연결하는 '강주아오 대교' 개통식을 열었다. 당시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국내 인천대교(18㎞)보다 3배나 긴 강주아오 대교(55㎞)가 뚫리면서 기존 3시간30분이 소요되던 거리는 30분으로 줄었다. 한달 전에는 홍콩-선전-광저우를 잇는 고속철도 개통식도 있었다. 홍콩과 중국 광둥성은 육로로 1시간 생활권이 됐고, 중국 본토와의 경제통합도 가속화될 전망이다.
이 원장은 "마치 전교 1·2등을 하는 우수한 학생이 더 열심히 공부하듯, 홍콩과 싱가포르는 지금도 계속 인프라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며 "홍콩은 2030년까지 국제공항도 크게 늘릴 계획이다. 홍콩은 아시아의 '초연결자(super connector)'로 교통·금융·물류·관광 등 모든 부문의 허브가 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 역시 2017년에 GDP 대비 인프라 투자 비중이 4.4%였지만, 2020년까지 6.0%로 늘리고자 한다. 이미 창이(Changi)공항 확장, 투아스항만 공사,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까지 연결하는 고속철도 건설 등을 추진 중이다. 아울러 인프라 투자 확대 및 생산성 향상 차원에서 정부조달제도 개선도 병행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축소지향의 인프라 정책을 전환해야 할 것이라는 이 원장은 "단순히 OECD 국가의 GDP 대비 인프라 투자가 얼마인지를 운운할 게 아니다. 실태조사에 기반해서 필요한 투자 영역이 어디인지, 얼마나 투자해야 할 것인지를 정해야 할 것"이라며 "국민들은 지금과 같은 인프라 투자상태가 지속되면 미래의 수준은 더 악화될 것으로 내다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가 생활SOC 투자를 늘리고자 한 방침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정부에서 규정한 생활SOC는 그 범위가 너무 좁다고 지적했다. 이 원장은 "지역의 소규모 도서관, 문화시설 등을 확충한다고 해서 일자리가 얼마나 늘겠나"라며 "우리 정부가 말하는 생활 SOC는 외국에서 철도·항만과 같은 기존의 전통적인 경제인프라에 대응하는 '사회 인프라(Social Infrastructure)'로 분류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외국의 사회 인프라에는 생활권 도로를 포함하고 있다. 이에 우리도 생활SOC 같은 애매한 용어를 쓸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사회 인프라로 명칭을 바꾸면서 그 범위도 생활권 도로를 포함하는 등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지금 수도권 주민들은 출퇴근이 편리하고 시간을 앞당겨 줄 수 있는 도로나 철도의 공급을 간절히 원한다. 수년 동안에 걸쳐 수도권 내 많은 아파트와 신도시 공급이 이뤄졌기 때문에 새로운 광역교통망 계획의 수립이 필요하다. 따라서 지역민의 편의를 고려한 생활권 도로와 같은 인프라도 당연히 생활SOC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KOTRA 해외수주협의회장도 맡고 있는 이 원장은 해외건설 활성화 방안에 대해 "지금까지 국내 건설경기가 호황일 땐 해외건설을 잠깐 등한시했다가 반대 상황이면 재진출을 모색하곤 했다. 최근 4∼5년에 걸친 국내 주택시장 호황으로 해외진출에 대한 열정이 약화된 것도 사실"이라며 "내년에 국내 건설경기가 위축된다고 해서 다시 해외진출 활성화가 이뤄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분석했다.
대형 건설업체들부터 해외사업의 부실화가 회사 존속을 좌우할 정도로 심각했고, 이제서야 간신히 어느 정도 정리한 상황이다. 이 원장은 이런 과거의 아픈 경험이 해외진출에서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뿐만 아니라 해외시장의 패러다임도 바뀌었다. 단순 도급공사 수주는 어렵고, 대개 시공자 금융주선이나 민간투자 및 개발사업 중심이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양질의 저임금 노동력과 가격에만 의존한 해외건설시대는 이미 끝났다고 정리했다.
◆ 9·13 대책 이후 주택시장 내년에 안정세 이어갈까
내년 건설수주는 최근 5년 내 최저 수준으로 하락하고, 건설투자도 올해 대비 3%가량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이 원장은 이 같은 원인으로 민간 주택시장의 위축을 꼽았다. 주택분양 실적을 보면 2015년에 약 53만호가 공급됐지만, 내년에는 30만호에도 못 미칠 것으로 집계됐다. 이미 콘크리트 파일업체 등 주택사업의 선행공종을 담당하는 곳들은 시장 규모가 절반이나 줄었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있다. 이처럼 건설경기가 얼어붙게 되면, 2019년 상반기 이후에는 건설부문발 일자리 한파가 닥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원장은 "남북경협에 대한 건설업계의 기대감은 높지만, 내년도에 이렇다할 일거리가 나오긴 어려울 것이다. 9·13 대책은 다주택자 등의 수요억제에 초점을 뒀고, 주택시장의 안정화에도 기여하고 있다"며 "주택시장의 중장기적인 안정을 위해 30만호 공급대책이 내년에는 조기 가시화됐으면 한다. 심각한 침체를 겪고 있는 지방 주택시장에 대한 보완책도 시급한 과제로 주택정책은 수도권과 지방의 투트랙 접근이 요구된다"고 제안했다.
이 원장은 건설경기가 하향국면으로 빨려들어갈 때일수록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기본적으로 균형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기가 과열되면 브레이크를 밟아주고, 경기 침체 시기엔 부양책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경제의 변동성을 줄여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내년에 민간의 주택경기 침체가 당초 예상보다 더 심각할 경우 공공건설투자를 확대하면서, 미뤘던 서울시의 대형 부동산 복합개발 프로젝트도 진행할 것을 언급했다.
민간투자사업의 전향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 원장은 "정부 재정의 한계도 있지만, 민간의 창의와 혁신을 도입하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민간투자사업은 지속돼야 한다. 이를 통해 해외의 민간투자시장 진출도 가능해진다"고 알렸다. 이어 "동시에 건설업계도 기업가 정신의 회복이 시급하다. 미래의 낙관론과 모험정신이 핵심"이라며 "모두가 움츠러들 때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다. 이외 정부의 적극적 규제개혁도 기업가 정신을 불러올 수 있는 방안"이라고 덧붙였다.
◆ 이상호 원장은
△경남 김해 출생(1964) △서울대 정치학과(1987)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 행정학 석사·박사(1995)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정책연구실장(1995~2006) △GS건설 전략담당 겸 경영연구소장(2007~2013) △한미글로벌 사장(2014~2015) △한국건설산업연구원장(2016~) △건설산업비전포럼 공동대표(2017~)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해외수주협의회장(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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