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서얼로 마음 나눈 벗 이조연, 갑신정변 때 뜻밖의 피살로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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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은혜 기자
입력 2019-01-16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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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④조선의 관중·포숙아, 동농과 완서

 

〈이조연 편지〉, 『근묵』, 행초서, 26×42㎝,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완서(浣西) 이조연(李祖淵)

조대비는 한눈에 가진을 알아봤다. 풍양 조씨 세도가 조만영(趙萬永)의 딸로 태어나, 순조 19년(1819) 나이 열둘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스물셋에 남편 효명세자(孝明世子, 익종 추증)를 보내고, 마흔둘에 아들 헌종(憲宗)을 잃은 대왕대비 조씨. 늙은 생강이 맵다고, 지엄한 대궐에서 뒷방늙은이 취급을 당하며 30년 세월을 절치부심(切齒腐心)한 그녀의 안목은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조대비는 수렴청정의 자리에 오른 직후 “오직 재능에 따라 임명하여 억울하다는 탄식이 없도록 하라”고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 명했듯이, 서얼 문제 해결에 호의적이었다(한홍구, <김가진 평전>). 그렇다고 쳐도, 안동 김씨라면 분해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조대비가 아니던가. 조대비와 만남은 동농이 그만큼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알려주는 일화라 하겠다.
하지만, 이 당시 조대비에게는 힘이 없었다. 실권(實權)은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쥐고 있었다. 서얼 차별 역시 대원군이 본격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면서 다시 강화되었다(한홍구, <김가진 평전>). 조대비는 가진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파격적으로 진언(進言)의 기회를 주었으나, 등용의 문은 결국 열리지 않았다.
동농은 시를 잘 지었다. 내로라하는 권세가 도련님들이 그를 초대했다. ‘상갓집 개’라는 손가락질을 감내하며 술 한잔에 난을 치던 파락호 시절의 흥선군처럼, 어쩌면 젊은 시절의 그도 주석(酒席)의 흥을 돋우는 묵객(墨客)으로 불려 다녔는지 모른다. 흥선은 곁다리라도 왕족. 위악(僞惡)도 목표가 있어야 의미를 얻는 거다. 가진은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다. 재주가 많아 욕을 보는 수도 있구나….


# 북사(北社)

붓을 놓을 수는 없다. 문(文)은 선비의 표상(表象)이자 마지막 희망이다. 가진은 마음이 심란할 때면 벗을 찾았다. 족히 말을 섞을 만하고, 무엇보다 처지가 비슷한 친구들이 여럿 되었다. 이들과 여는 시회(詩會)는, 잠시나마 열패감(劣敗感)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학구열을 재충전할 안성맞춤의 자극제였다.
자연스레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가진이 가장 애착을 갖고 정성을 쏟은 모임은 북사(北社)였다. 명칭은 회원들이 사는 북촌에서 따왔을 터인데, 그때 북촌은 요즘 북촌과 위치도 의미도 약간 다르다. 도성 안 주거지는 청계천을 경계로 위는 북촌, 아래는 남촌(南村)이라 불렸는데, 권문세가나 당상관(堂上官)의 식솔은 대궐이 가까운 북촌에 모여 살았다. 양반이라도 남촌에 살면 우습게 여겼고, ‘남산골 샌님’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지금 북촌은 가회동 일대에 보존된 한옥마을을 가리키는 지명(地名)이 되었지만, 그때 북촌은 위치로는 동농이 태어나고 자란 경복궁 서편의 신교부터 창덕궁 동편까지 아우르는, 의미로는 ‘진짜 양반 동네’라는 대명사의 성격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북사라는 모임 이름에는, ‘우리도 양반의 자제로서 사대부 자격이 충분하다’는, 부정(否定)당한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픈 강렬한 욕구가 스며 있던 것이다. 북학(北學)까지 연결하면 말장난이 되겠지만.
동농은 북사와 관련된 시를 많이 남겼다. 시제(詩題)만 훑어봐도, <북사제군자(北社諸君子)>, <북사제공(北社諸公)>, <북인제우(北隣諸友)> 등과 같은 시가 눈에 뜨인다. 북사 모임은 꽤 오래 유지된 듯하다. ‘제우(諸友)’ 혹은 ‘제반(諸伴)’이란 이름의 정기모임이 있었고, 친분에 따라 며칠씩 나들이를 떠나 우정을 돈독히 하곤 했다(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 “우리 서로 알아주니 간과 창자 같구나”

나를 알아주는 친구란 나 이상이다. 관중(管仲)은 포숙아(鮑叔牙)를 세 번 속이고 실망시켰다. 동업하자며 슬쩍 더 챙기고, 벼슬길에 추천했더니 번번이 쫓겨나고, 싸움터에 나가 혼자 도망가고. 그때마다 포숙아는 관중을 감쌌다. 가난해서, 때를 만나지 못해서, 노모를 모시고 있기에. 오죽하면 관중이 이렇게 고백했겠는가.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아다.” 동농에게는 설령 포숙아가 환생해 곁에 온들 바꿀 수 없는 친구가 있었다.

자나 깨나 자네를 늘 잊지 못하네.
우리 서로 알아주니 간과 창자 같구나.
………
북사(北社) 모임 여러 해에 많은 약속 어기었는데
외로운 등불 깜박이는 이 밤 배나 더 빛나네.
온 산의 계수나무 떨기 속 다락에 비친 달빛만 가득한데
훗날까지 서로를 생각하는 맘 오래오래 가지세.
(김외현, <동농 김가진전>, p89에서 재인용)


여완서언회(與浣西言懷), 완서와 나눈 말을 잊지 않고 있다는 시다. 완서(浣西) 이조연(李祖淵, 1843~1884). 그는 동농의 생애 전반(前半)을 논할 때, 반드시 소개해야 할 인물이다. 이조연은 동농보다 세 살 위로, 부친이 서자였기 때문에 서류(庶類)로 차별을 당했다. 두 사람은 홍안(紅顔)으로 만나 이조연이 갑신정변으로 횡사(橫死)할 때까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을 서로 나누며, 간담상조(肝膽相照)하는 사이였다. 동농은 이조연에게 보내는 시를 많이 남겼다.

내 삶이 슬프고 한스러움을 다스리기 어려웠는데
이곳에서 서로 만나니 눈이 갑자기 밝아오네
………
산호(珊瑚)는 본래 푸른 바다에서 나는데
노마(駑馬, 느리고 둔한 말)는 어찌하여 태항산(太行山) 오르듯 곤고한가
세상만사는 한잔 술만도 못한데
푸른 난간 빗긴 해에 다시 그 정을 그리네.
(述懷與浣西, 김외현, <동농 김가진전>, p89~90에서 재인용)



# “내 평생 헛되어 독서에만 기대었으나”

세간에서는 동농을 가리켜 “다재다능(多才多能)하고 박학다식(博學多識)한데, 박지약행(薄志弱行)하다”고 평했다(신동준, <한국사 인물 탐험>, <월간조선> 2008.4). 박지약행은 심지가 엷어 실행력이 없다는 뜻이다.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사람의 성정(性情)이란 여간해서는 변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일흔넷에 망명을 결행한 위인이 ‘박지약행’ 했다는 건 납득하기 힘들다.
동농은 ‘박지약행’ 했던 게 아니라, 신분의 제약 때문에 오랫동안 뜻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이다. 조선은 차별의 사회였다. 일본이 임란 때 잡아간 도공(陶工) 이삼평(李參平)에게 신사(神社)까지 세워주었던 것과 달리, 정작 조선 안에서는 이름을 남긴 도공이 단 한 명도 없다. 매천 황현은 나라를 빼앗기고 자결해 선비의 의기(義氣)를 보여주었으나, 서얼들에게는 지독하리만치 험담으로 일관하고 있다.

내 평생 헛되이 독서에만 기대었으나
지금은 백수로 놀기만을 좋아하며 한강변을 거니네.
궁(窮)하든 현달(顯達)하든 백년이 모두 운수가 있어
문장은 풍부하여 다시 짝할 이 없네.
(酌酒與天遊, 김외현 <동농 김가진전>, p97에서 재인용)


아버지가 정2품 의정부 좌참찬으로 승차했어도, 가진의 앞날은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강태공과 제갈량을 떠올리며,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으리라 자위(自慰)해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실의(失意)와 낙백(落魄)의 세월은 납덩이처럼 청년 가진의 폐부(肺腑)를 눌렀다. 그때, 다정하게 위로하며 천하의 정세를 토론하고 그를 환로(宦路)로 이끌어준 이가 이조연이었다.

“이조연이 나를 천거했다. 나는 실로 감격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쏟으며 장차 부미(附尾, 이조연의 뒤를 따라다니겠다는 뜻)하며, 왕사(王事, 나랏일)에 진췌(盡悴, 몸이 닳도록 애쓰다)할 것을 다짐했다.”
(신동준, <한국사 인물 탐험>에서 재인용)


이조연이 갑신정변 때 급진 개화당의 칼끝에 무참히 쓰러지자, 동농은 붓을 들어 가버린 친구에게 바치는 제문(祭文)을 쓰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동농 김가진과 완서 이조연. 서자(庶子)의 낙인이 찍힌 몸으로 태어나, 멸시와 천대를 딛고 밝은 아침의 나라를 만들자 맹세했던 두 사람. 동농과 완서는 조선의 관중과 포숙아였다.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정리 = 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사진 = 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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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서(浣西) 이조연(李祖淵)

이조연은 일본과 청을 방문하여 견문이 넓었으며 서양역사에 대해서도 열심히 공부하였다. 수신사 일행이 귀국한 뒤 민비(閔妃)가 그들을 내전에 불러 외국사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조연은 이때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여성의 권리가 점차 커져가고 있고 여왕이 나온 경우도 있으며, 황후가 국정에 개입하는 일도 있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하여 민비의 환심을 샀다. 민비는 이조연의 말에 매우 흥미있어 하면서 “외국사정에 훤히 밝은 것은 이조연 이상이 없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조연은 이후 예조참판을 지냈고, 고종과 민비의 각별한 신임과 원세개(袁世凱), 오장경(吳長慶) 등 청 장수들과의 인연을 바탕으로 1883년 10월 군대가 좌우 2영체제로 개편될 때는 좌영감독(우영감독은 윤태준)을 맡았고, 1884년 7월 군대가 전후좌우 4영체제로 개편될 때는 좌영사를 맡아 전영사 한규직, 우영사 민영익, 후영사 윤태준과 함께 고종과 민비의 최측근에서 군권을 행사했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발발했을 때, 이조연은 사대당으로 지목되어 김옥균 등의 지시를 받은 생도 및 장사들에 의해 전영사 한규직, 후영사 윤태준 등과 함께 살해당했다. 갑신정변 당시에 살해당한 이조연은 흔히 사대당의 영수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주로 갑신정변에 직접 가담한 자들이 주장에 따른 것이다.
이조연이 비록 청측 인사들과 가깝기는 했으나 그를 친청파나 사대당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제자로 <한성순보>의 창간에 깊이 관여했던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는 김옥균이 서문을 쓴 자신의 서울 체류 회고록 <한성지잔몽(漢城之殘夢)>에서 이조연과 한규직을 사대당(또는 청국당)이 아니라 러시아당으로 분류했으며, 원래 일본공사관에 자주 출입했었던 것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홍영식 등이 아니라 이조연과 한규직이었다고 쓰고 있다
이조연은 청과도 깊은 관련을 맺었지만, 일본에 두 차례나 수신사의 종사관으로 다녀온 바 있는 손꼽히는 일본통이었고, 일본 측 입장에서 볼 때 러시아당으로 분류될 만큼 러시아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쉽게 친청당, 친일당, 친로당으로 분류할 수 없는 인물로, 고종의 측근으로서 필요에 따라 외세와 가깝게 교섭한 근왕파 개화관료라 할 수 있다.

(한홍구, <김가진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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