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마구치 대신궁(山口大神宮)
"일본의 성공은 조선의 구제와 중국의 개혁을 의미할 것이다. 전 동양을 위해 일본이 성공하게 되기 바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성공을 축하하며, 윤치호 1984.9.27.
"1909.7.5. 서울: 부상(무궁화 나라 일본)과 근역(무궁화 지역 한국)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扶桑槿域何論態)"
-소네 아라스케 조선 통감 <바로 그 다음날>
"1909.7.6. 도쿄: 한국병탄 방침 각의 결정(韓国併合の方針を閣議決定)"
-가쓰라 다로 총리
"윤치호가 애국가의 후렴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이 끼일때에 비로소 근화 즉 무궁화를 「無窮花」라고 쓰기 시작한 듯."
-동아일보 1925.10.21.
“법고창신(法古創新), 고전을 본받되 고치고 변화시킬 줄 알아야 하며 새것을 창조하되 고전에 의거할 줄 알아야 한다.”
- 연암 박지원.
"그런데 우리는 기존 문헌을 검증없이 무뇌증 암송하는 거로만 장한 체하여 왔다. 애국가와 무궁화가 극명한 사례다."
-강효백
◆역대 日군국주의 성골 총리들의 본향 나가토의 천양무궁 무궁화
일본의 국교 신토(神道)에서는 '무한'을 쓰지 않고 '무궁(無窮)'을 쓴다. 천양무궁(天壤無窮: 천황영토의 무궁한 확장)이 신토의 최고신 아마테라스의 제1신칙이기에 그렇다. 야마구치 주민들은 아마테라스가 천양무궁의 신칙을 내린 하늘이 야마구치현 부근으로 여긴다.
아마구치현에서는 황실 신토와 국가 신토가 강세를 보인다. 특히 아베신조 일본 총리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와 외종조부 사토 에이사쿠의 고향 다부세정(田布施町)은 ‘천조황대신궁교(天照皇大神宮教)'라는 극단적 천황숭배 신토의 신흥교파가 번성하고 있다.
일본의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지만 야생무궁화 군락지 야마구치현에 위치한 신사의 경내외에는 무궁화 나무가 심어져 있다. 일장기와 욱일기의 원형 히노마루(日の丸)와 소우탄(宗旦)외에도 시로기온마모리(白祇園守, 흰 토지신 부적), 아카하나가사(赤花笠, 빨간 꽃삿갓)와 시하이(紫盃, 보라색 제례용 배)등 신토의 제례용어가 붙은 무궁화 품종이 주류를 이룬다.
야마구치 지방은 원래 7개의 쿠니(國)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7세기에 남부의 스오(周防)국과 북부의 나가토(長門)국의 2개국으로 통합됐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엔 둘을 합쳐 조슈번(長州藩)으로 통합했다. 흔히들 죠수번의 사무라이 집단이 메이지 유신의 주체세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남부의 스오국 출신은 변방의 북소리일 뿐, 북부의 나가토국 출신군벌들이 핵심 중의 핵심을 이룬다.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에서 아베 신조까지, 야마구치 출신 총리 9명 모두 제국주의 팽창주의 성향이 강하지만 야마구치 북부 출신이 더욱 심하다. 우리나라 동해와 마주하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일까? 지금도 야마구치 북부 사람들 대다수는 3세기경 진구(神功)황후의 삼한 정벌과 가야가 일본 지배지역이었다는 임나일본부설, 야마구치 북부가 진구황후 군대가 삼한 정벌을 떠날 때 제사를 모셨던 곳이라는 날조된 신화들을 실제 일어났던 역사처럼 믿고 있다.
야마가타, 가쓰라, 테라우치, 다나카, 아베 등, 역대 나가토국 출신 일본 총리들의 극우 팽창주의 및 한반도에 대한 침략성향이 남부 출신 총리들의 그것보다 훨씬 공격적이고 노골적이다. 야마구치현 남부스오국 출신 총리들이 군국주의 진골이라면 북부 나카토 출신들은 '군국주의 성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메이지 유신의 양대 견인차는 야마구치 남부의 이토 히로부미의 재사 집단과 북부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대표하는 무사 집단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외교 분야로, 야마가타는 군사·무력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견인해 나갔다.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총리를, 야마가타는 초대 국군대신을 역임했다. 둘 다 팽창주의자로, 이토는 주로 능수능란한 외교술의 제국주의, 야마가타는 무자비한 무력침략으로 군국주의 성향이 강했다. 가쓰라 다로, 테라우치 마사다케, 소네 아라스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다나가 기이치 등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참혹한 불행을 가져다준 일본 군국주의 아버지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05) 군벌의 아이들이라 할 수 있겠다.
◆일제 군국주의 대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천양무궁 무궁화
일제 군국주의 대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무궁화 군락 국가천연기념물 소재지인 야마구치현 하기시의 가와시마(川島), 옛 지명 아사히(旭)촌에서 하급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 근처 쇼인신사(松陰神社)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교육을 받으며 타도 막부 운동을 펼쳤다. 조슈 번의 군대인 기병대에 가담하여 에도 막부를 타도하는데 무공을 세웠다.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 3월 야마가타는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를 만나 그로부터 군국주의, 팽창주의를 배웠다. 1870년 8월 귀국후 병부소보(兵部小補, 국방 차관보)에 임명된 야마가타는 고향의 아사히촌에 만발한 소우탄 무궁화를 본딴 16줄 욱일기를 제작해 1874년 1월 일본제국 통합육군기로 공식 사용하도록 했다.
1882년 야마가타는 '황군'의 복무 규율을 규정한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선포하였다. 그가 3대 총리로 재직할 때인 1890년 군국주의적인 교육관을 규정한 ‘교육칙어’를 반포했다. 이 315자로 된 교육칙어의 핵심어는 천황영토의 무궁한 확장 ‘천양무궁(天壤無窮)’으로서 일본 본토뿐만 아니라 일제 패망시까지 모든 식민지와 통치지역의 신민들에게 암송을 의무화했다.
이듬해 1891년 아마가타는 총리직을 그만두고 추밀원 의장, 육군대신 등을 맡으며 천양무궁 군국주의 실행의 큰 그림을 그렸다. 드디어 1894년 청일 전쟁을 도발, 56세의 야마가타는 육군총사령관이 되어 평양전투를 직접 지휘해 대승을 거두었다.
청일전쟁 개전 즈음 일본 전역에서는 ‘천양무궁’ 구호와 함께 ‘천양무궁’의 상징꽃 무궁화 관련 문학예술 활동이 폭증하였다. 하이쿠의 개혁 시대를 불러온 마사오카 시키(1867~1902)는 청일전쟁 시 종군기자로서 수많은 무궁화 하이쿠들을 발표했다.
"고지대와 아침 해가 이렇다 하네 무궁화 울타리"-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의 대표 하이쿠, 청일전쟁 참전시 1894년 10월 작
마사오카는 35세의 짧은 생애에 무궁화를 주제로 한 하이쿠만 48수나 발표했는데, 그 중 두 수는 비석에 새기어 사람의 무덤보다 높은 목근총(木槿塚)으로 숭배받고 있다.
야마가타는 청일전쟁의 승전 전리품으로 대만을 획득함과 동시에 조선의 통치권을 획득하고 조선의 체제를 일본식으로 바꾸는 이른바 갑오경장을 주도했다. 일본식 정치 경제 사회 문화체제로 전환됨과 동시에 수많은 일본식 한자어들이 쓰나미처럼 한반도에 밀려 들어왔다.
◆‘윤치호=무궁화 작명자’ 및 ‘무궁화=일본 꽃’ 스모킹 건
필자는 최근 천양무궁의 상징 꽃 ‘무쿠케’를 ‘무궁화’(無窮花)로 최초 작명한 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을 실은 일제강점기 신문기사를 발견했다.
다음은 <동아일보> 1925년(大正 14년) 10월 21일자 ‘조선국화 무궁화의 내력’ 제하에 실린 관련 기사다. 맞춤법 수정 없이 그대로 옮긴다.
<現代에 無窮花>
그러나 근화 즉 무궁화를 지금과 가치 무궁화無窮花라고 쓰게 되기는 극히 젊은 근대의 일이라 합니다. 아마 지금부터 이십오륙년전 조선에도 개화풍이 붙게 되여 양인의 출입이 빈번하게 되자 그때의 선진이라고 하는 윤치호씨(尹致昊)씨 등의 발의로 우리 대한에도 국가가 잇서야 된다고 한편으로 양악가도 세우고 한편으로 국가도 창작(?)할대 태어난 --- 영원무궁하소서. 附屬되어 생기었다고 하는(?) 마르고 닳도록 하는 애국가의 후렴인 「無窮花 三千里 華麗江山」이라는 구절이 끼일 때에 비로소 근화 즉 무궁화를 「無窮花」라고 쓰기 시작한듯합니다.
1890년대 이전 우리나라는 무궁화 나무를 ‘목근’으로 무궁화 꽃을 ‘근화’로 표기해왔다. 일제와 식민사관에 의해 후일 원문에 마음대로 괄호 열고 ‘무궁화’ 넣고 괄호 닿고 변조 한 무궁화 가짜 텍스트 말고는 한글로나 한자로나 ‘무궁화’ ‘無窮花’로 표기된 사례는 '0'이다.
그런데 189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초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하면서 근화를 ‘無窮花’로 사상 최초 표기했다는 사실을 실은 동아일보의 기사는 ‘윤치호=애국가 작사자 겸 무궁화 도입자’ 및 ‘무궁화=일본꽃’의 핵심 스모킹건의 하나라 하겠다.
◆우리나라에 가장 몹쓸 짓을 많이 한 가쓰라 다로의 천양무궁 무궁화
지난 7월 19일 주일 한국대사에게 상식을 벗어나는 무례를 범한 고노 다로(1963~) 일본 외무상은 가쓰라 다로(1848~1913) 총리의 환생인가?
두 다로는 세 가지가 같다. 첫째, 이름이 같다. 둘째, 극우 군국주의 팽창주의 성골이다. 셋째, 무궁화와 관련이 깊다.
고로 다로는 뱃지의 핵심 문양이 무궁화인 일본 극우파 일본회의의 간부회원이고, 가쓰라 다로는 무궁화 군락지 태생에다 한국을 무궁화 지역 근역으로 조작해내며 무력으로 한국을 병탄한 자다.
일본 역대 63명 총리 중 을사늑약, 경술국치 등 우리나라에 가장 몹쓸 짓을 많이 한 가쓰라 다로는 1848년 야마구치현 하기시 시내 히야코(平安古)에서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쓰라의 출생지 히야코는 야마가타의 출생지와 바로 옆 동네다. 직선거리 1km도 채 안되는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다.
가쓰라는 1868년 열 살 연상의 동향 선배 야마가타의 평생 심복이 되어 메이지 유신 출발에 공헌했다. 1894년 청일전쟁때 야마가타는 가쓰라를 제3사단장으로서 랴오닝 반도 침략을 맡겼으며, 청일전쟁 승전으로 획득한 전리품 대만을 통치하는 제2대 대만 총독으로 파견했다. 1901년 야마가타는 가쓰라를 11대 총리로 등극하게 해 그에게 한국을 대만에 이어 두 번째 식민지로 만드는 과업을 부여했다.
1903년 4월 21일, 교토의 헤이안 신궁에서 난젠지로 가는 거리에 있는 야마가타의 별장 무린안(無隣庵)에 네 명의 거물이 모였다. 야마가타, 이토, 가쓰라,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다. 무린안에 있는 양관(洋館) 2층에서 이 넷은 만주는 러시아가, 조선은 일본이 차지하는 방향으로 추진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러시아와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로드맵을 작성했다.
이때 작성된 ‘무린안의 로드맵’에 따라 가쓰라는 이토가 길러낸 윤치호를 움직여 1904년 8월 22일 제1차한일협약(갑진늑약)을 체결, 대한제국의 정책결정권을 상납받았다. 외교·재정·군사·교육 등 대한제국의 모든 분야 정책을 일제가 파견한 고문관의 재가를 받아야 하게끔 한 이 협약으로 대한제국은 이날 사실상 '사망'했다.
가쓰라는 러일전쟁 승리 직후인 1905년 7월 29일, 미국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과 한국은 일본이, 필리핀은 미국이 차지한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이어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마저 탈취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날은 갑진늑약으로 이미 사망한 대한제국 시체의 입관일이라 할 수 있겠다.
◆일제, 한국을 근역(무궁화지역)이라 명명한 다음 날, 한국 병탄 결정
가쓰라 2차 내각(1908.7.14~1911.8.30) 시절 가쓰라는 제 2대 조선통감 자리에 자신의 동향 후배 소네 아라스케를 앉혔다. 1909년 7월 5일 저녁 고종이 베푼 조선통감 이취임식 축하연에서 소네는 이런 시를 읊는다.
“부상(무궁화 나라 일본)과 근역(무궁화 지역 한국)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扶桑槿域何論態)”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인 1909년 7월 6일, 가쓰라 총리 내각은 한국 병탄의 방침을 확정했다.
안중근 의사가 그해 10월 26일 이토히로 부미를 사살하기 이전에 이미 한국병탄은 결정됐음을 알 수 있다. 즉,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대한제국의 장례식(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을 앞당겼다는 일본과 국내 친일사학계 일각의 주장은 사실이 전혀 아니다.
가쓰라는 일본 역대 총리 63명 중 최장수 재임기간 2886일 동안 군비 확장과 대외 세력 확대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무궁화 나라 부상 일본이 한국을 ‘무궁화지역(근역)’으로 변조하여 한국병탄을 완수하고 내선일체의 사전정지 작업을 전개하였다.
윤치호가 작사한 애국가의 ‘국’은 독립국 ‘국’이 아니라 일본의 보호국으로 ‘국’ 또는 봉건 일본 시대의 지금의 ‘겐’(縣)급인 ‘쿠니’(國)다. ‘대한사람 대한’으로는 대일본제국의 일본사람의 보호를 받는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을 염원하는 가사이다.
◆악명높은 무단통치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천양무궁 무궁화
데라우치 마사타케(1852~1919)는 하기시와 야마구치시 경계 야마구치-아사히선(山口旭線) 62번 지방도가 지나는 산골에서 태어났다.
데라우치는 야마가타가 창립한 육군에 소위로 하였으며 야마가타 군벌의 추천으로 고속승진했다. 1882년 프랑스 주재무관이 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1898년 일본 육군교육 총감을 지냈다.
1900년대 초에는 남만주 철도 설립위원장을 맡았다. 1902년 3월 육군 대신이 되었으며, 러일전쟁에 승전한 공로로 자작이 되고 육군 대장까지 승진했다. 1910년 5월 제3대 한국통감부 통감으로 부임하여 한일합방을 성사시키고 초대 조선총독이 되었다.
이후 1911년까지 육군대신과 조선 총독을 겸하여 조선과 일본을 오갔다. 데라우치는 헌병이 경찰역할을 겸임하는 헌병 경찰 제도를 창시해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는 무단정치를 펼쳤다. 1916년 데라우치는 18대 총리대신에 취임과 동시에 육군 원수로 승진했다.
데라우치 역시 야마가타와 가쓰라를 이어 강력한 군국주의·팽창주의 대외 정책을 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이 조차하고 있던 산둥반도와 독일의 식민지였던 태평양 섬들을 점령했다. 데라우치는 조선 총독 재임기간 중 내밀히 헌벙과 총독부 관헌을 시켜 마을 어귀마다 무궁화를 이식했다. 1912년 태형은 조선인에 한한다는 악명높은 ‘조선태형령’을 제정한 직후 ‘티격태격 싸우며 무궁화를 심는 것이 조선인의 의무다’라는 변태가학성의 시를 쓰며 즐겼다.
◆히노마루 무궁화는 히노마루 일본 국기를 낳은 어머니
대한제국이 망하고 테라우치 초대 총독이 무단정치를 행하는 이듬해 1911년 5월 일제 내각 문부성은 맨 앞장에 <히로마루의 기>라는 동요가 실린 소학교 1학년 음악교과서를 펴냈다.
"흰 바탕에 빨강 히노마루(日の丸)가 물들인다. 아아 갓 만든 거 일본의 깃발은."
<히노마루의 기> 가사처럼 일본의 국기 히노마루는 당시 ‘갓 만든 거’였다. 히노마루 기는 1872년(메이지 5년)에 비로소 일본 국기로 공식 사용되기 시작한 것임에 비하여 히노마루 무궁화 품종명은 꽃무늬가 ‘해를 실은 배(日の丸)’와 같다고 해서 12세기 가마쿠라 시대부터 생겨난 것이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일본의 모든 동식물과 제품의 품종명에 히노마루(日の丸)가 붙은 건 무궁화가 유일하다. 즉 히노마루 기는 히노마루 무궁화를 평면에 펼쳐 국기로 형상화한 것이다. 따라서 자국을 사랑하는 일본인이라면 자국의 국기 히노마루 기를 낳은 어머니 무궁화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것인가? 더 나아가 그 무궁화를 해외에 널리 이식, 무궁 확산하고 싶지 않겠는가? 게다가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 식으로 자국의 국익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하여 타국의 영역과 국익에 대한 수탈과 침략을 일삼는 극우 군국주의 지도자라면.
◆일제의 세계지배를 꿈꾼 다나카 기이치, 천양무궁 무궁화의 황금시대를 열다.
1922년 3월 28일 다나카 기이치 육군 대장이 상하이 황푸탄에 도착했다. 의열단 오성륜이 먼저 다나카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명중되지 않았고, 이어 김익상이 폭탄을 던지고 이어 권총을 연사했다. 이도 명중하지 못했다. 제3의 저격수로 이종암이 나서 폭탄을 던져 다나카가 타고 달아나는 자동차 앞바퀴를 맞췄으나 불발됐다. 오성륜과 김익상은 체포됐고 이종암은 군중 사이로 숨어 붙잡히지 않았다.
다나카는 동향 야마구치 출신의 도쿄제국대학 법대 출신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급 전범, 731부대장, 난징대학살 시체 처리반장)를 총애해 상공부 요직 과장에 발탁했다.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가 아베 신조 총리다.
다나카 기이치는 1864년 야마구치현 하기시 무궁화 군락지 가와카미촌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7년 일본제국 제26대 총리로 등극한 다나카는 내실에 충실하는 수렴정책에서 천황영토의 무궁한 확장 -천양무궁의 공격적 팽창정책으로 전환했다.
1927년 7월 25일 다나카는 세계지배 전략이 담긴 다나카 상주문(田中上奏文)을 히로히도 일왕에 바쳤다. 다나카 상주문은 일본이 중국 전역을 정복하려면 만주와 몽골을 장악해야만 하고, 중국의 괴뢰정권을 어떻게 만들고 이것을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구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1928년 1월 18일 다나카 총리는 자신의 고향 야마구치현 하기시 남동쪽 가와카미 촌 아부강 상류의 얕은 여울에서 중류의 약 4㎞ 양안일대와 헤이케야마(平家山, 해발 280m)의 석회 절벽에 자생하는 무궁화 군락을 국가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그리고 자신의 친신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육군대신으로 하여금 산둥반도 침략을 단행했다.
시라카와는 천양무궁을 외치며 수많은 중국 양민을 학살하는 와중에 그는 포탄 껍질로 만든 꽃병에 ‘천양무궁’을 새기기까지 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어 한달 동안 앓다가 죽었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천양무궁 천황폐하 만세’였다. 시라카와는 지금 다른 1급전범들과 함께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 배향돼 있다.
그러나 다나카 기이치의 진정한 오른팔은 다카하시 코레쿄(高橋是清)대장상이다. 다카하시는 1929년 발생한 세계공황을 극복한 공적으로 1930년대 일본 제국의 돈줄을 쥐었다. 다카하시는 1932년 6월 대장성 조폐국 인쇄,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 발행 10원권 지폐에 무궁화 도안을 넣어 유통하게 했다. 이를 시작으로 1945년 2월까지 조선은행이 발행한 모든 지폐권 (전 10종) 앞면에 크고 명확한 무궁화 도안을 넣었다.
이는 무궁화가 일본 혼네(속마음)의 나라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자 한국이 천양무궁 일본영토의 연장이며 한반도 영구지배의 야욕을 대내외에 선포한 것이다.
무궁화가 새겨진 조선은행권은 1937년 중일전쟁 직후에는 2억8000만원으로 늘어났고, 2차대전 종전이 임박한 1945년 3월에는 35억7000만원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한국은 물론 만주와 중국의 일제 점령지의 유통 화폐중 40% 이상을 조선은행권이 차지할 만큼 ‘천황 영토의 무궁한 확장’의 천양무궁화의 약칭, 무궁화는 광활한 일제 점령지역에 만개하여 극성기를 구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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