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 칼럼] 지방문화재로 처박힌 '고려사'를 국보로 승격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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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19-09-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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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속활자, 상감청자 등으로 이름 떨친 고려 역사서 '고려사'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돼도 손색 없어

  • 조선왕조실록, 삼국유사 등과 마찬가지로 국보 지정돼야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신채호>
"이 나라의 지나간 5000년 역사가 내 몸속에 있다." <함석헌>
"나의 문학은 외로움이고 사학은 그리움이고 철학은 새로움이다. 전공인 법학은 올바름을 향한 사무침이다. < 강효백>

지난 8개월간 필자는 밤낮을 잊고 애국가와 무궁화를 융복합·문사철·인문사회과학 방법에다가 자연과학 접근법까지 더한 ‘쌍끌이 기선 저인망 어법식’으로 훑어보았다. 아주 오래 왜곡되고 은폐됐던 사실들을 발견하는 순간마다 필자는 경악했다. 그중에서 역사방법론으로 접근하다 받은 대표적 충격 두 가지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 한국사 6대 대표사서 총 약 2억 9800만자 중 한민족 고유의 나라꽃이라는 무궁화가 단 한 글자 그것도 단명의 상징으로 나온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경악한 대목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국보는커녕 보물도 아닌 시도지방유형문화재로 처박혀 있다는 사실이다. '고려사'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4호, '고려사절요'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5호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 팩트였다. 

예로부터 중국이 제일 많이 사용한 우리나라의 국호는 ‘高麗’(고구려도 '고려'로 칭함)다.

11세기부터 13세기 세계 3대항은 고려의 수도 개성 인근인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와 이집트 나일강 하구 알렉산드리아, 중국 푸젠성 해안의 취안저우(泉州)다. 특히 송 나라때 고려는 실존했던 '동방의 유토피아, 이상향'의 이름이다. 참고로 직전 중국 최고 경제사령탑의 상무부총리(제1부총리, 정치국상무위원)의 이름도 ‘장가오리(張高麗, 1947년 취안저우 출생)'다.

알다시피 '코리아(KOREA, 또는 COREA)' 대한민국 영문표기는 국제무역항 벽란도를 오가던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인도와 중동, 유럽 등 세계전역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고려'는 중국의 4대 발명 가운데 하나라는 진흙활자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세계가 공인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창출해낸 나라 이름이다. 그리하여 고려는 일본이 가장 열등감을 느끼는 국호다.

어디 이뿐인가. ‘도자기(china)'의 나라 차이나(CHINA)조차도 흉내조차 낼 수 없었던, 고려의 상감청자, 송 나라 최고급 종이의 10배 이상으로 거래되었던 고려의 종이(高麗紙) 등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의 극치를 이룬 '실존하였던 지상천국'이다, 고려라는 이름은.

자기학대 자기비하의 식민사관의 슬픈 역사의 상처가 너무 깊고 오래가서 그렇지, 실상은 해상세력의 영웅 왕건이 건국한 '고려(高麗, KOREA)'는 기존의 후삼국을 재통일한 데다가 고구려의 후예이자 ‘용솟음치는 바다’라는 국호의 '발해(渤海, Rising Sea)'와 신라 말엽 그 일몰의 바다를 찬란히 빛낸 장보고의 해상왕국, 이 둘을 합하여 이어받은, 즉 '3국+2α'의 통일왕국이자 '동방의 무역대국'이었다.

이러한 반만년 한민족 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당당하고 강인한 시련과 극복의 자주독립혈사 '고려사'는 한국사상 최고의 명군 세종대왕이 주도해 편찬했다. 1438년(세종 20년), '고려사'를 편찬하기 시작해 1448년(세종 30년)에 완성, 초판을 찍어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이 책이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위해 고려왕조를 지나치게 폄하했다고 판단, 김종서와 정인지 등에게 개찬을 하게 해 결국 1451년(문종 1년)에야 완성됐다. 청신했던 조선 초기 최정예의 지성을 집약해 펴낸 '고려사'는 세가 46권, 열전 50권, 지(志) 39권, 연표 2권, 목록 2권 등 총 135권 7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축약본 '고려사 절요(1451년)'를 편찬할 만큼 글자 수 총 336만9623자의 방대하고 세세한 '고려사'는 사료 선택의 엄정성과 객관적인 서술 태도로 세계적인 극찬을 받고 있다.

이처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도 손색이 없는 이름 그대로 ‘높고(高)’ ‘아름다운(麗)’ 위대한 '코리아 왕국(Kingdom of Korea, 936~1392)'의 대표 사서가 정작 지금의 '코리아 공화국(Republic of Korea, 1948~)' 대한민국에서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국보도 보물도 아닌 지방유형문화재로 내팽개쳐 있는 것일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문화재 가운데 보존가치가 있다고 선정한 것에 일련번호를 붙여 관리하기 시작했다. 보물 1호는 남대문(숭례문), 2호는 동대문(흥인지문)식으로 총독부에서 거리가 가까운 순으로 번호를 붙였다. 해방 이후 국보와 보물을 구분해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한 이후로 지금까지 일제강점기 일련번호가 유지되고 있다.

문화재 중에서도 그 분야, 그 시대를 대표하는 유일무이한 것들을 국보로 지정돼 있다. 대한민국 국보는 현재 국보 1호 ‘숭례문’부터 국보 327호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2019년 6월 26일 지정)'가 있다.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를 제외한 한국대표 사서 '조선왕조실록'(국보 151호)', '승정원일기'(국보 303호), '삼국유사'(국보 306호), '삼국사기'(국보 322호)등 모두 국보로 지정돼 있다.

국보 한 단계 아래 국가지정 문화재인 보물은 현재 보물 1호 ‘흥인지문’부터 2036호 ‘안성 칠장사 대웅전’(2019년 8월 29일 지정)이 있다. 수 천개의 보물 목록에는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한 최초의 역사서 '제왕운기'(보물 418호) 등도 있지만 '미암일기'(보물 제260호), '충재일기'(보물 제261호), '초간일기'(보물 제879호) 등 조선시대 지역 유지의 개인 일기와 이현보 종가문집(보물 1202호), 오운종가 문적(보물 1203호) 등 특정 가문의 문적도 보물로 지정돼 있다.

그런데 코리아 공화국이 그가 국호를 이어받은 코리아 왕국의 양대 대표사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조선 시대 일개 지역 유지의 개인 일기나 특정 가문의 문적보다 못한 지방유형문화재로 처박아 둔 사실을 믿기에는 너무 참담하다.

더욱이 이러한 자기 역사부정, 자기 역사모독, 역사문화 패륜 만행을 저질러 놓고도 이제까지 그 수 많은 각계각층의 내로라할 명사와 석학, 논객들 그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는 이 기막힌 현실에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극심한 자괴감과 환멸감과 아울러 책임감을 통감한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길게 말하지 않겠다.

코리아 공화국이 국호와 적통을 이어받은 코리아 왕국의 후예라면, 현재 대한민국이 일본의 식민지나 보호국이 아닌 세계 10위권 중견강국이자 주권독립국가라면, 문화재청 등 관계 당국은 하루빨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국보로 승격시킬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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