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위치한 낙원악기상가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악기상점 집결지다. 낙원상가 2층과 3층에 들어선 악기 전문점들은 300개에 달한다. 이는 악기만을 취급하는 상가로는 가장 큰 규모다.
낙원상가는 1969년 완공된 이후 50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켰다. 1960년대는 비틀즈가 등장한 시기로, 세계적으로 록이 절정에 이른 시기다. 그 즈음 우리나라에서도 미8군 영내 클럽을 중심으로 연주력이 뛰어난 음악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대 초 '트윈폴리오', 1980년대 '쎄시봉' 등 통기타 음악의 전성기가 찾아오자 의류 등 다양한 제품군을 판매하던 낙원상가는 1980년대부터 악기 전문 상가로 자리잡았다. 당시 낙원상가는 악기를 사고파는 공간 이상이었다. 낙원상가는 당대 음악인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펑크 난 멤버를 찾던 '음악의 메카'였다.
지난 2일 낙원상가 2층에는 낯선 DJ부스가 설치됐다. 번쩍이는 네온사인 조형물도 들어섰다. 오후 2시가 지나자 푸른 빛이 나는 무선헤드폰을 끼고 DJ의 믹싱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레스-큐(res-cue) 낙원, 디제이 파라다이스'라는 이름의 사일런트(Silent) 디제잉 파티를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사일런트 디제잉 파티는 말그대로 조용한 음악 행사다. 참가자들은 DJ가 틀어주는 같은 음악을 각자 무선헤드폰으로 '함께' 들으며 흥겹게 몸을 흔들었다. 조용하지만 신나는 파티였다.
낙원상가는 최근 젊은 세대의 '핫 플레이스'로 등극한 익선동과 인접해 있지만 여전히 2030세대에게는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이곳의 상징인 '음악'을 통해 젊은층과 소통할 수 있는 다리를 놓고자 '파티'가 마련된 것이다. 'd/p'의 이민지 큐레이터는 "행사를 통해 젊은 사람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종로3가와 낙원상가라는 곳에서 여러 연령층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믹싱하는 디제이를 통해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 한때 젊은 음악인의 메카···이제 주고객층은 60대 이상
"80년대에 낙원상가에서 장사를 시작한 이후 여기에 찾아 온 젊은이들이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굉장히 큰 역할을 하는 뮤지션이 됐다. 악기 시장과 음악 산업 활성화는 언제나 젊은 층들이 이끌어 오지 않았나"
"80년대에 낙원상가에서 장사를 시작한 이후 여기에 찾아 온 젊은이들이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굉장히 큰 역할을 하는 뮤지션이 됐다. 악기 시장과 음악 산업 활성화는 언제나 젊은 층들이 이끌어 오지 않았나"
낙원상가 2층에서 하모니카를 판매하고 있는 상인 A씨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피아노 판매로 시작해 35년간 낙원상가와 함께한 A씨는 음악이 좋아 악기를 팔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다만 연주할 수 있는 악기는 없다는 '반전'을 털어놓으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수십년의 세월이 허투루 흘러가지는 않는법. 손님들이 매장에 와서 어떤 복잡한 곡 이름을 얘기해도 음률을 떠올릴 수 있는 수준까지는 도달했다며, 악기와 함께 한 세월을 반추했다.
과거의 이야기를 할 때면 힘이 넘쳤던 A씨였지만, 낙원상가의 현실은 못내 아쉬울 수 밖에 없다. 음악 발전의 주축은 항상 청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는 젊은 층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낙원상가가 깨끗하게 단장하고 디자인도 바꾸면서 젊은 층들을 끌어오기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다"면서도 "그러나 하모니카를 포함한 모든 악기를 사 가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취미로 악기를 배우는 노년층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외모가 워낙 가수 태진아씨와 흡사해 '낙원상가의 태진아'로 불리는 B씨도 상가의 터줏대감이다. 예전에 촬영차 낙원상가를 찾았던 방송국 PD가 본인을 보고 놀라 깍듯이 인사하기에 "태진아 아니고 닮은 사람입니다"라고 설명하기도 했었다며 웃었다. 약 35년 동안 '연세악기'를 운영해왔던 B씨 역시 상가를 찾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뜸해졌다고 말했다. 여전히 밴드 동아리 같은 곳에서 기타를 사러 오는 대학생들이 있긴 있지만 최근에는 그마저 많이 줄었다고 밝혔다.
B씨는 "(젊은 고객들이) 약간 있다. 약간. 많이 줄어들었다"면서 "예전에는 서울대 법대 기타 동아리에서도 기타 사러 오고 했었다. 그 사람들이 결혼도 하고, 법관이 돼서 찾아오기도 하고. 근데 지금은 대학에 그런 동아리가 많이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B씨는 부모가 데려오는 아이들이 아니면 젊은 사람은 구경하기가 훨씬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20대가 주고객층이었다면 요즘에는 문화센터나 동호회 등에서 처음 기타를 배우면서 기타를 사 가는 60대 이상 고객들이 주를 이룬다"면서 "(고객 중) 10명 중 6명이 정도가 장노년층이다"라고 밝혔다.
앰프 수리 전문 매장 '세미음향'을 찾자 베레모를 쓴 채 수리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주인 정병열 씨가 있었다. 그 또한 30년 동안 낙원상가와 함께 한 이다. 정 씨 역시 낙원상가를 주로 찾는 이들이 60대 이상으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학교나 교회, 7080 라이브 바 등에서 앰프를 구매하거나 수리하러 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에는 이미 기본 장비들이 갖춰진 곳이 많아 어렵다"며 "동네에 있는 색소폰 동아리들이 그나마 앰프를 찾는 수요층"이라고 설명했다.
◆ "젊은 층의 소비 중요하지만...젊은 층이 맘놓고 음악하기 힘든 환경"
상인들은 낙원악기상가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젊은 층의 악기 소비가 늘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하면서도 젊은 층이 예전처럼 쉽게 음악을 할 수 없는 환경이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상인들은 낙원악기상가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젊은 층의 악기 소비가 늘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하면서도 젊은 층이 예전처럼 쉽게 음악을 할 수 없는 환경이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상인 B씨는 "요즘 청년들은 만약 20만원이 있다 해도 그걸로 기타를 사서 여가생활을 즐길 만한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 같다"고 밝혔다. 또 "대학교 음악 동아리들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고, 악기를 배워 보고 싶어하는 젊은 층들은 금전적 여유가 없어 자비로 기타를 구입하기 어려워한다"고 말했다.
정병열 씨는 "요즘 젊은 층들이 음악해가지고 먹고 살기 힘들 것"이라면서 "취미생활로 직업을 가지고 음악을 해 성장하면 좋을텐데, 우리나라는 그럴 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야 젊은 층이 낙원상가에 많이 와서 장사가 잘 되면 좋은데, 음악 해서 (젊은 층들이) 크게 잘될 게 있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 "온라인 쇼핑 늘고 컴퓨터 하나로 음악 만들어...상가 방문 줄어들 수밖에"
"마틴 기타줄 있나요?" 상인 B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손님이 찾아와 기타줄을 찾았다. 손님은 백화점에 찾는 기타줄이 없어 낙원상가까지 찾아오게 됐다고 말했다.
B씨는 "예전엔 악기 사러 무조건 낙원악기상가에 왔었는데, 요즘 이렇게 찾아오는 손님은 50대 이상밖에 없다"며 "젊은 사람들은 이런 게 필요하면 다 인터넷으로 샀을 거 아닌가"고 말했다.
상인들은 음악 제작에 필요한 장비와 부품이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는 점도 젊은이들의 발길을 뜸하게 만드는 이유로 꼽았다.
앰프를 수리하는 정병열 씨는 "요즘 나오는 앰프들은 들어가는 부품이 다 작게 바뀌어서 앞으로는 수리도 힘들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요즘 음악 장르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이제는 컴퓨터 하나 놓고 방 안에서 모든 걸 뚝딱 만들고 있으니 젊은 층의 악기 구매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 그 시절은 추억이 됐지만... '공존' 꿈꾸는 낙원상가
수십년간 낙원악기상가를 지켰던 상인들은 과거의 찬란했던 시절을 추억하기도 한다. 상인 A씨는 "지금은 한산하지만, 한 때는 이 복도가 사람들로 꽉 차서 다니기도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고 말했다.
상인 B씨는 "서태지가 데뷔 전 바이크를 타고 와서 지금이랑 똑같은 말투로 '저기 있잖아요, 이 기타 있나요' 하면서 통기타 2대를 사 갔다"며 "지인 기타 심부름을 온 거였는데 어느날 그렇게 뜰 줄 몰랐다"고 들떠 이야기하기도 했다. 서태지는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 밴드 '시나위'에서 베이시스트로 활동했다.
낙원악기상가의 장소 일부는 추억의 장소로 탈바꿈했다. 종로에서 단성사 등과 함께 영화산업을 주름잡던 낙원악기상가 4층의 '허리우드 극장'은 2010년 55세 이상 어른을 대상으로 추억의 영화를 상영해 주는 '실버영화관'으로 바뀌었다.
이제 젊은 이들이 귀해진 낙원상가였지만, 2일 디제잉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20~30대였다. 낙원악기상가에 사람들이 바글거리던 그 시절 흘러나왔을 음악과 장르는 달랐지만 청춘들이 모여 음악을 즐기는 모습은 닮아있었다.
'레스-큐 낙원, 디제이 파라다이스' 행사를 기획한 이민지 큐레이터는 "낙원악기상가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도 좋지만, 어르신들을 위한 공간도 함께 남아 있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한 공간에 어르신들과 젊은 사람들 같은 개별적인 존재들이 서로 같이 있는 것들이 이 공간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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