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운길산은 겨울부터 여름까지 흰색이 주조를 이룬다. 겨울이면 온 산이 얼어붙어 설산(雪山)이 되고, 눈이 녹은 봄이면 하얀 배꽃으로 뒤덮인다. 여름에는 운해(雲海)가 흰 장막처럼 산을 가린다. 4계절 중에 가을만 단풍으로 붉고 그 외엔 하얀색 풍광이 운길산을 점령한다.
운길산의 팔분능선에 자리잡은 수종사(水鐘寺)는 한강 남쪽 검단산까지 전망이 툭트였다. 뭐니뭐니해도 최고의 경치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한강으로 합류하는 경치를 수종사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풍수와 지리에 밝았던 서거정(1420~88·세조 때 대제학)이 ‘동방 사찰 중 제일의 전망’이라고 한 찬사는 조금도 과장이 없다.
수종사에는 조선의 명사들과 시인 묵객들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다산 정약용은 수종사의 추억이 서린 시를 여러 편 남겼다. 14살 때 지었다는 시 ‘수종사에 노닐며(遊水鐘寺)’에는 세상 곳곳을 두루 다닌다 해도 수종사만은 잊지 않고 다시 찾겠다는 다짐이 담겨있다. 그는 과거공부를 수종사에서 했다. 1783년(정조 7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면서 학문이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그가 진사 시험에 합격했을 때 다산의 부친은 "이번 길이 초라해서는 안 된다. 두루 친구들을 불러 함께 가라"고 격려했다. 다산은 성균관의 친구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 마현 생가에서 잔치를 벌이고 수종사에 놀러간 이야기를 시에 담고 있다.
운길산 8분 능선 자리잡아···'동방 사찰 중 제일의 전망' 자랑
'마재에서 나이 든 사람은 소나 노새를 타고 젊은 사람들은 모두 걸어갔는데 절에 도착하니 오후 3~4시가 되었다. 동남쪽의 여러 봉우리들이 때마침 석양빛을 받아 빨갛게 물들었고, 강 위에서 햇빛이 반짝여 창문으로 비쳐 들어왔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즐기는 동안 달이 대낮처럼 밝아왔다. 서로 이리저리 거닐며 바라보면서 술을 가져오게 하고 시를 읊었다.'
조선시대에 수종사는 왕실 여인들의 원찰이었다. 왕에 따라 부침하는 궁궐의 여인들은 한양에서 가까운 수종사에 불상을 시주하면서 발원문(發願文)을 불상 안에 넣고 현세의 평안과 내세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수종사에는 태종의 다섯 번째 딸 정혜옹주(?~1424)의 부도가 있다. 옥개석의 낙수면에는 ‘太宗太后/貞惠翁主/舍利造塔/施主文化柳氏/錦城大君正統/四年己未十月日(태종태후/정혜옹주/사리조탑/시주문화류씨/금성대군정통/사년기미시월일)’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태종의 첫번째 후궁인 의빈권씨(1384~1446)가 정혜옹주의 사리탑을 조성했는데 문화류씨와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1426~1457)이 시주했으며 정통 4년 기미년(1439년) 10월에 세웠다는 기록이다.
수종사에는 세조와 관련된 창건설화가 내려온다. 전설에 따르면 세조는 1458년 오대산 주변의 온천과 월정사를 다녀오던 길에 두물머리에서 하룻밤을 묵는데 새벽에 멀리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신하들과 그 종소리를 따라 운길산에 올라 소리 나는 곳을 찾아보니 폐사(廢寺)의 굴 속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였다. 세조는 굴속에서 18 나한을 발견해 절을 세우게 하고 사찰 이름을 수종사라 지었다고 한다.
세조가 계유정난의 피바람을 부르고 왕위에 오른 것이 1455년인데 정혜옹주 사리탑의 명문을 보면 그보다 16년 전에 세워진 것이어서 ‘수종사 세조창건설’의 사실성이 부정된다. 그러나 세조가 수종사의 중창을 지원하고 강원도 약수터에 다녀오는 길에 수종사를 찾은 것은 여러 기록에 비추어 사실에 부합한다. 바위틈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를 먼 곳에서 종소리로 듣고 세조가 찾아왔다는 전설은 절 이름의 유래와 관련해 신비성을 높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유당전서에 나와 있는 다산의 기록이 더 사실적이다. 다산의 '유수종사기(游水鍾寺記)'에는 "신라 때 지은 고사인데 절에는 샘이 있어 돌 틈으로 물이 흘러나와 땅에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낸다. 그래서 수종사라 한다"고 돼 있다.
후궁인 의빈 권씨는 태종이 승하한 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 밖에 없는 딸 정혜옹주가 1424년(세종 6년)에 시집갔다가 5년 만에 세상을 뜨자 불교의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의빈 권씨는 소중하게 딸의 사리를 보관하고 있다가 부도를 세우고 안치했다. 부도 안에서 나온 사리를 담은 '뚜껑 있는 청자항아리'와 금제9층탑, 은제금사리기기는 보물 259호로 지정됐다.
의빈 권씨는 궁에 있을 때 세종의 부탁을 받고 손자 뻘인 금성대군을 품안에서 길렀다. 금성대군은 정혜옹주가 죽은 뒤에 태어났지만 자신을 돌봐준 의빈 권씨를 기쁘게 할 양으로 호사스런 사리함을 만들어 부도에 넣어준 것이다.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서 다른 대군들은 세조의 편에 가담해 권세를 누렸으나 금성대군은 아버지 세종과 맏형 문종의 뜻을 끝까지 받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불상 시주하며 넣은 발원문엔 '현세 평안, 내세 극락왕생' 기원
대웅보전 옆에는 정혜옹주의 부도와 함께 팔각오층석탑 , 작은 삼층석탑 등 석탑 3형제가 서 있다. 1957년 팔각오층석탑을 수리할 때 탑신과 옥개석 등에서 19구의 불상이 나왔고 1970년 이전할 때는 2층 3층과 옥개석에서 12구의 불상이 더 나왔다. 함께 발견된 묵서를 통해 성종과 인조 때 중수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석탑 중 유일한 팔각오층석탑으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높다. 보물 1808호.
팔각오층석탑 기단 중대석에서 발견된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하단부의 명문을 통해 제작연대와 발원자인 인목대비가 확인됐다. 인목대비는 선조의 계비로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광해군 집권 후 폐비가 되어 서궁에 갇혔다. 그리고 그녀의 소생 영창대군은 광해군의 묵계(默契) 속에 살해됐다. 인륜에 어긋난 폐모살제(廢母殺弟)는 인조반정의 명분을 제공했다. 광해군이 폐주로 전락하면서 인목대비는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지만 죽은 아들 영창을 살려낼 수는 없었다. 인목대비는 수종사를 찾을 때마다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친정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1628년(인조 6년)에 봉안된 불상들은 성인(性仁)이라는 조각승이 제작했다. 불상들을 눈여겨보면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려 움츠린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목이 짧고 수인(手印)을 맺은 양손도 매우 작다. 옹색하고 초라하고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다. 불교미술 전문가들은 인목대비의 가슴에 묻힌 영창대군의 모습이 불상에 반영된 것 같다고 해석한다.
올해로 562살 두 그루 은행나무 , 모진 세월 견디고 서있네
운길산 일대 토지의 상당 부분은 수종사의 둔전(屯田)이었다. 수종사는 둔전을 경작해 남한산성의 군사들에게 식량을 공급했다. 남양주에서 생산한 식량은 한강과 경안천을 통해 남한산성에서 가까운 상번천까지 배로 실어날랐다. 광해군 인조 연간의 문신 임숙영은 수종사의 승려들이 둔전에서 나온 소출로 돈놀이를 한다고 비판했다. 수종사의 주지는 안팎의 살림을 잘 꾸리는 사판승(事判僧) 출신이 많았던 탓인지 오래된 절 치고는 큰 스님의 부도가 적은 편이다.
수종사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두 그루 서 있다. 1458년(세조4년) 이 절을 중창하면서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고 수종사 사적기에 기록돼 있다. 이 은행나무는 2020년 기준으로 562살이다. 수종사를 오간 왕실의 여인들과 조선의 명사들, 그리고 승려와 민초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은행나무는 모진 세월을 견뎌내고 우뚝 서 있다.<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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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유당전서, 정약용, 한국고전종합DB
-소재집, 임숙영, 한국문집총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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