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16) 충선공 문익점은 베트남에서 목화씨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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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전) 조선대 교수, 전)한국베트남학회 회장
입력 2020-07-02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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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한민족과 베트남민족은 기원전 108년과 111년에 각각 한(漢) 무제의 침략을 당해 지배를 받았고,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공통점이 많다. 두 민족의 교류역사는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공민왕 때 삼우당 문익점 선생이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순제(順帝)의 미움을 사서 교지(交趾: 베트남의 옛 이름)로 3년간 귀양을 갔었다는 기록이 있다. 문익점 선생은 교지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교지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가지고 되었고, 귀국할 때는 교지에서 목화씨앗을 가지고 귀국해서 목화재배와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목화가 한반도에 널리 보급됨으로 해서 일반 백성들의 의복이 무명옷으로 바뀌게 되었고, 왕족과 귀족 권문세가 사람들만이 입고 덮던 솜옷과 솜이불이 일반 백성들에게도 보급되게 된 것이다. 후일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문익점의 그 공적을 “일반 백성들에게 값싸고 질 좋은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后稷)씨와 같다”고 높이 평가할 만큼, 목화 보급은 한민족 복식사에 대전환을 이루게 한 커다란 사건이었다. 문익점 선생은 명주, 모시, 삼베, 칡넝쿨로 옷을 해 입던 한민족에 무명옷을 널리 입도록 하여 추위를 면하게 한 인물이다. 이러한 기록은 충숙공 삼우당 실기(實記)에 전해져 온다.
 

삼우당 문익점 영정



◼강성(江城) 문씨 시조 - 문익점
문익점(文益漸)은 고려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고려 말의 문신으로 한민족과 베트남 교류역사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본관은 남평(南平)으로, 강성(江城) 문씨의 시조이다. 호는 사은(思隱) 또는 삼우당(三憂堂)으로 작위는 강성군,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공은 30세 때인 1360년(31대 공민왕 9)에 포은(圃隱) 정몽주와 함께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현재의 부군수에 해당하는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이 되었다. 이어 성균관의 순유박사(諄諭博士)로, 왕에게 직접 충언을 간하는 사간원의 좌정언(左正言)으로 승진하였다. 33세 때인 1363년 사간원 좌정언으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공민왕은 즉위 초부터 원나라를 배격하고 자주 정책을 시행하고, 원나라 황후가 된 고려인 기(奇) 황후의 아우인 기철 등 친원파를 숙청해서 고려와 원나라 간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다. 이에 원나라 순제는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26대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책봉했다. 충선왕은 25대 충렬왕의 아들로 어머니가 원나라 공주였으니 한민족 최초의 몽골계 혼혈 왕인 셈이다. 덕흥군은 본명이 왕혜(王譓)이며, 몽골 이름은 타스티무르(塔思帖木兒), 법명은 탑사(塔思)이다. 덕흥군은 어린 시절 승려로 출가했다가 30대 충정왕 때 원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어, 원나라에 머물며 기(奇)황후와 결탁하여 원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덕흥군은 최유와 함께 원나라 군사를 빌려 고려를 치기 위하여 평안도 의주까지 진군하여 왔었으나,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에 패하고 돌아간 적이 있다. 원나라 군사를 빌려 조국인 고려를 침공하여, 이복 조카인 공민왕의 왕좌를 빼앗으려했던 것이다.

◼ 원나라 황제의 명을 어겨 교지로 귀양
문익점이 원나라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즈음은 원나라나 고려 모두 국운이 쇠하여 간신들이 득세하면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고, 지배계층은 분열되어 신흥 혁명세력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주원장은 1368년에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明)나라를 건국하였고, 고려는 1392년 이성계 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세력에 의해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왕조 말기의 험난한 정치 상황에서, 공민왕은 자신의 복위를 위해 원나라에 수차례 사신을 파견하였고, 사신단 일행으로 정사(正使)에 찬성사 이공수(李公遂), 부사(副使)로 밀직제학 허강, 서장관(書狀官)에 좌정언 문익점이 선발되어 원나라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제2황후로 고려사람 기(奇) 황후가 있었는데, 기 황후는 친원파인 자기 동생 기철이 공민왕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원망하여 동생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기 황후는 황제의 힘을 배경으로, 친원파인 덕흥군을 고려의 왕으로 임명하도록 했던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를 바로잡고자 사신을 원나라에 파견하였는데, 충직한 문익점 선생이 일행으로 뽑힌 것이다. 이때에 적신(賊臣) 최유가 원나라 황후 기(奇)씨와 깊게 결탁하고 덕흥군(德興君)의 옹립을 도모하고 있었으니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공은 이에 항쟁하다가 덕흥군의 저택에 무려 42일이나 구속되었다. 문익점 선생은 덕흥군을 따르라는 원나라 황제의 명을 거역하였다. 원나라 황제는 공을 불러, “너는 변방 속국의 지체 낮은 신하의 몸으로서 천자의 명을 따르지 않으니, 네 살자고 한들 살아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공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의(義)로는 두 군주를 섬기지 않는다 함이 옛 사람의 훈계이옵니다. 폐하께서는 신을 죽이시어 천하에 고(誥)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니, 원나라 황제는 더욱 노해서 문익점을 사형에 처하려 했다. 그때, 원나라 조정의 대신들이 그의 충직함을 아까워하여 황제에 용서를 간언하자, 사형을 면하고 1363년 11월에 교지로 귀양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교지에서 3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면서 교지사람들과 어울려 필담을 주고받고, 시를 주고받고 한 기록이 <운남풍토집(雲南風土集)>이나, 전해지지 않아 상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 교지에서 목화씨를 가지고 귀국
교지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문익점 선생은 1366년 황제의 용서를 받아, 그 해 9월에 연경으로 출발하였다. 원나라 황제의 윤허로 귀양길에서 풀려 연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밭 가운데 가득 피어있는 백설 같은 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따르고 있던 김룡(金龍)으로 하여금 꽃을 따오도록 하였다. 이에, 한 노파가 다급한 소리로 와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엄히 금하는 꽃을 누가 감히 따는가? 관에서 알면 벌을 받는다며 목화송이를 빼앗아 갔다. 하지만 문익점 선생이 워낙 의연하게 행동을 하니 모름지기 관에 수색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며 꽃을 되돌려주었다, 12월에 연경에 당도하니 황제가 예부시랑(禮部侍郞)과 어사대부(御使大夫)의 벼슬을 주었다. 1367년 정월에 37세인 문익점은 황제에게 여러 번 본국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황제는 공에게 큰 벼슬을 주고 높이 쓰려고 불허하였다. 이에, 연로한 부모가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음을 지성으로 말함에, 황제는 귀국을 허락하고 말과 황금을 주어 예우를 하였다. 2월에 고려 땅을 다시 밟으니 햇수로 5년 만에 고향을 찾아 부모를 만난 것이다. 귀양을 갔다가 교지에서 가지고 온 목화씨앗을 붓두껍 속에 숨겨 가지고 들어오는 데 성공한 선생은 장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를 재배하였다. 목화 재배기술을 몰라 겨우 한 그루만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을 3년여의 노력 끝에 드디어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 곳곳에 목화씨를 보급하였다. 선생의 손자 문래(文萊)는 목화에서 실을 뽑는 수레를 만들어 문래(文萊)라고 이름하고, 문영(文英)은 베짜는 방법을 만들어 문영(文英)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와음(訛音)되어 물레가 되었고, 물레에서 실을 뽑아 천을 짠 것을 무명이라고 하였다. 문씨 가문은 한민족의 복식사를 새로 쓴 획기적인 공적을 남긴 위대한 가문이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 선생과 장인 정천익이 목화를 처음으로 재배한 터인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익점 묘소(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산75-1)-지방문화재 66호[ ]



◼ 불사이군의 절개로 낙향
문익점 선생은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 혁명 세력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준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오로지 유학의 발전에 헌신하였다. 고려가 망하는 시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의리와 절개를 지킨 대유학자로, 사망한 다음 조선왕조에서는 태종 때 참지의정부사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해졌고, 1440년 세종 때에는 영의정부사 부민후에 봉해져 강성(江城) 문씨의 중시조가 되었고, 세조는 사당을 지어 모시라하고, 도천사(道川祠)를 사액(賜額)하였다. 정조는 도천사에 사액하여 도천서원(道川書院)으로 하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도천서원은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있다.
 

도천서원 전경(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 경남문화재 237호[ ]



충선공 문익점은 불사이군으로 원나라 황제의 미움을 받아 교지로 유배되었고, 조선 왕조에서는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선생의 공적은 조선왕조 내내 칭송받았고, 선생의 충의와 높은 절개는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조선왕조 세종 때부터 목화로 만든 면포는 백성을 추위로부터 구하고, 나라의 경제와 세금을 거두는 데 화폐와 같은 역할을 했으니, 목화를 보급한 문익점 선생의 업적은 한민족사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공적이다, 사료가 멸실되어 교지에서 3년간의 유배생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한국과 베트남 관계의 역사적인 사실을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충숙공은 문익점 선생의 선조 문극겸(文克謙)의 시호이다.
자료출처: 충숙공 삼우당 실기(忠肅公 三憂堂 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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