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는 중국에서 들여온 한국 유학의 본향이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享)을 배향하는 소수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소수서원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무섬마을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감싸고 흘러가는 전형적인 물도리 마을이다. 다양한 형태의 구조를 지닌 40여 채 고택이 옛 그대로 남아 있다.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이 해우당(海愚堂) 고택이다. 이 건물은 선성 김씨 입향조인 김대(金臺)의 손자가 1830년에 건립했고 고종 때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이 1879년에 중수(重修)했다. 사랑채에 걸려 있는 해우당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다.
시원(始源) 김흡영 전 강남대 신학과 교수(72)는 해우당의 5대손이다.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자란 그가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집안에 파란을 몰고 왔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무섬마을은 아직도 유교적인 관습과 사고방식이 철저히 뿌리박혀 있다. 한국의 큰 마을에는 으레 교회가 들어서 있지만 무섬마을에는 교회가 없다. 국가에서 유교 문화 존속 마을로 공인했다. 김 교수는 해외에 오래 있었고 신학과 교수를 지내다 보니 고향 마을에 가면 가끔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지금 연구하고 묵상하고 글 쓰는 곳은 소수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소백산 자락에 있습니다. 영주에 살다 보면 ‘아직도 기독교는 우리 종교가 아니다’라는 느낌이 듭니다. 나의 글방에서 산 너머로는 부석사, 왼쪽으로 소백산 비로봉이고, 오른쪽으로는 소수서원입니다. 유불선의 고적을 가까이 두고 ‘나의 신앙 기독교는 무엇인가’를 20년간 명상했습니다. 거기서 나온 생각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작업에 다석이 좋은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김 교수는 원래 공학도였다.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를 나와 전공을 살려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그 후 미국 뉴욕에서 무역상사 주재원 생활을 하다가 종교적 체험을 하고 신학을 공부했다.
“집사람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아내는 유교 풍습이 배인 집안에 시집와서 처음엔 나와 종교 문제로 갈등이 좀 있었습니다. 나는 이방 종교인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다투다 보면 저희 집사람이 항상 마지막에 꺼내는 말은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이더라고요. 내가 논쟁에서는 밀리지 않았지만 하나님이라는 소리는 머리에서 뱅글뱅글 돌았죠. 하나님이 뭔지 알아야겠다 싶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내가 쓴 ‘도의 신학 Ⅱ’라는 책의 부록에 나오는 간증처럼 하나님께서 밤 중에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연히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유가로 똘똘 뭉친 집안에서 자란 내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거죠.”
그가 기독교에 귀의한 후 1982년 어머니 장례식 때 사달이 났다. 아버지는 종교에 관해 관용적이었다. 그는 장남으로서 맏상주의 유교적 권한을 행사해 어머니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치렀다.
“그때 나는 아주 적극적인 기독교도였습니다. 종파는 장로교였죠. 1970년대 뉴욕의 한국 교회들이 엄청난 전도와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던 시절이었어요.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하늘나라가 있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게 최고고 절대였죠. 그 누구도 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덕을 베풀어 일가친척과 동네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었어요. 장례식에 400~500명이 모였는데 기독교로 장례를 치르니 어른들 사이에 난리가 났습니다. 나중에는 집안 어른들과 친척들이 옛 식으로 따로 하시더라고요. 나를 지극히 아껴주던 큰어른은 매우 슬픈 표정으로 ‘네놈이 어떤 신앙과 종교를 가져도 좋지만, 천 년 이상 지켜온 전통을 깨버릴 줄은 몰랐다’ 하고 돌아서서 가버리셨습니다. 그때 내가 깜짝 놀랐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깨닫고,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 결과는 친척에 큰 아픔을 주고 우리 전통을 깨버리는 배신이었습니다. 이게 과연 옳은가. 거기서 나의 신학이 시작된 것이죠.”
"이웃 종교 품는 기독교가 되어야"
-지금 다시 어머니 장례식을 치른다면 기독교 식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물론이죠. 지금껏 내가 30년간 한 일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외국의 신학자들이나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한국 기독교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교회도 한국 종교의 막내라는 것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우리의 과거인 전통 종교를 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 장례식과 유교 장례식에서 두드러진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가장 큰 차이는 장례식의 주체가 누가 되느냐죠. 기독교 장례식의 주체는 하나님이죠. 진행은 목사가 하지만. 유교는 주체는 조상이고, 진행은 가족이 합니다. 신의 권위보다 조상에 대한 효(孝)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에선 철저히 신의 권위 아래서 하지요. 유교적인 장례는 효를 가장 중시하는 거죠. 기독교는 조상과 관련된 제사를 미신적 요소라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잘못 알고 있는 것이죠. 귀신하곤 사실 관계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는 이제 가장 강력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천년이 넘는 유교 불교의 전통 앞에서 기독교의 독특성 차별성이 중요했지만 우주를 섭리하는 하나님을 진정 믿는다면 이웃 종교를 품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입니다.”
김 교수는 다작(多作)이다. 공저를 포함해 저서가 39권 (영문 25권, 한글 14권)이고 논문도 58편이 넘는다. 다석 류영모에 관한 저서인 <가온찍기>(2013)에는 ‘다석 류영모의 글로벌 한국신학 서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베스트 셀러는 아니지만 대한민국 학술원의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고 학술서로는 드물게 3판이나 찍었다.
“미국에서 프린스턴 신학교와 캘리포니아 버클리의 GTU에서 10년간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우리 종교의 광석을 찾는 게 나의 큰 고민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우리 한국의 사상가 퇴계와 왕양명을 비롯해 신유학을 부지런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한국에 들어왔더니 강남대 동료 교수가 날 보고 이화여대 교회에 가서 김흥호 목사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고 해서 따라나섰죠. 김 목사가 우리의 경전과 성경을 비교해서 강의하더라고요. 김 목사가 그동안 강의한 카세트를 몇 백 개 주더라고요. 출퇴근할 때마다 차 속에서 들었습니다. ‘아차, 이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다석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석을 세계에 어떻게 소개시킬 것인가? 다석의 기독론을 영문으로 제일 먼저 썼는데요. 20세기 말 정평 있는 세계적인 수준의 종교 분야 단행본에 다석에 관한 글을 올린 건 내가 처음일 겁니다. 그 다음부턴 내가 개발한 ‘도의 신학’에 관련된 글들에서 조목조목 다석의 통찰을 집어넣고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석을 이해하는 해외 학자들이 늘어나는 데 도움을 줬다 할까요. 강남대학의 대학원 코스에도 최초로 다석 강좌를 넣었습니다.
다석은 정말 자유스럽게 동서를 회통(會通)해 풀어냈습니다. 과연 이것을 서양 기독교 신학 체계 속에서 기독교를 배운 목회자와 신학생들에게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고민했죠. 다석 사상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 위대한 광맥입니다. ‘아이고 다석 멋지다’ 라는 찬탄으로 그칠 게 아니라 교육의 소재로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후학들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김 교수는 저서 <가온 찍기>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반문화적으로 이식되고 기계적으로 전수된 서구적인 신학을 추종하기를 원한다’고 진단했다. 이런 보수적인 풍토에서 다석의 독창적인 생각을 다른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했다.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해본다면….
“지금은 정통 보수 기독교인들이 다석의 사상을 받아들이기가 정말 어려울 겁니다. 그러자면 껍데기를 여섯 번은 벗어야 하니까요. 알을 까는 것처럼. 특히 한국 기독교는 너무 굳어지고 단단해져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어느 정도 열려있는 기독교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변화시켜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사서삼경을 구약 대접하라’는 다석의 말은 동양문화라는 바탕 위에서 기독교를 바라본 인식을 잘 드러낸 말 같은데요. 동양의 전통문화를 미개한 것으로 바라보던 ‘선교사 신학’이 한국 교회를 주도하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시대를 앞서간 생각이 아닌가요?
"한국뿐 아니라 세계 종교의 흐름 속에서도 시대를 앞서간 분입니다. 한국 기독교계보다는 세계 기독교계가 더 빨리 다석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다석은 학자들에게 정말 힘든 숙제입니다.
영어로 논문을 몇 편 쓰고 있는데 정말 어려워요. 기독교의 지평을 넘어서 동양의 모든 경전을 회통하는 개념을 외국인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힘이 들어요. 그 다음 문제는 한글이에요. 한문은 세계적 수준에서 소통이 됩니다. 그런데 한글은 다석이 또 새로운 자기만의 우주를 만들어 놓아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다석이 ‘산보’ 또는 ‘정신 하이킹’이라고 이름을 붙인 기도문이 있습니다. 내가 ‘산보’를 stroll(sanbo), 정신 하이킹을 spiritual hiking으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서구 신학자의 제자들에 의해 이끌려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전략도 외국 신학의 제자가 된 사람을 개혁하는 것은 어렵고, 오히려 외국에서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을 목표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문으로 훨씬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다석은 ‘최후까지 진실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이 사람은 선생이라고는 예수 한 분밖에 모시지 않았습니다’라고 여러 군데서 강조하더군요. 그렇지만 다석을 종교다원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김흡영 교수는 다석을 기독교라는 신앙을 벗어나지 않는 곳에 두고 싶었던 김흥호 이화여대 전 교수의 신학과 맥이 상통하는 것 같은데요.
“일단 다원주의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신학을 하면서 종교 다원주의를 놓고 외국 신학자와 논쟁을 여러 번 했습니다. 서구에는 기독교밖에 없었잖아요. 그들은 선교를 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국 유럽을 넘어 아시아로 오니까 엄청난 종교들이 있던 거예요. 그래도 서구보다 열등하니까 계몽시켜야 하겠다고 선교를 했지요. 그러나 아시아의 종교들은 기독교보다 오래된 종교들이라 파면 팔수록 뭔가 나오는 거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기독교밖에 없고 기독교가 최상이라는 종교적 생각을 가진 서구 사상에서 나온 인식론적 개념이죠. 선교 전략하고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우린 기독교 이전에 유교 불교 도교 등 여러 종교가 있었는데 여기에 기독교가 끼어든 것입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종교의 다원성이 우리의 맥락입니다. 전혀 모르다가 이제야 깨달았다는 서구의 종교다원주의를 그대로 신학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기본이 안 된 거죠. 한국의 종교는 상생적이고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을 중시하지만, 서구적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못 살아요. 그래서 끊임없이 종교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까. 한국은 종교 전쟁이 없어요.
다석은 기독교를 넘어선 사람이죠. 한국 종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한국적 신학을 할 수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라서 그렇게 한 게 아니죠. 다석을 종교다원주의자라고 주장하면 얘기를 거꾸로 하는 것입니다.”
"다석은 제도권 테두리 벗어났지만 예수의 제자"
-다석은 기독교 테두리의 안에 있었습니까? 밖으로 나갔습니까?
“기독교의 제도권 테두리는 벗어났으나 예수의 제자인 건 틀림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의 도를 따라간 분입니다. 그리고 내가 김흥호 목사의 계보냐는 질문을 한 것이라면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하나님께서 직접 불러주신 나는 어떠한 계보도 없습니다.”
-해방 후 신학은 ‘신학 오퍼상’들이 들여온 ‘수입신학’ ‘번역신학’의 천국이었다고 서술했더군요. 기독교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보다 앞섰던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그건 학자로서, 제 범위를 벗어나니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한국의 신학교육에서 교재와 같은 책이 한 권 있었어요. 유동식 교수가 한국 신학의 광맥으로 감신대의 정경옥(자유주의), 총신대의 박형룡(보수주의), 한신대의 김재준(진보주의) 교수를 꼽았습니다. 셋 다 모두 미국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박형룡과 김재준 두 분은 장로교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정경옥은 시카고에 있는 개럿 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 분들이 미국에서 잠깐(2~5년) 배운 걸 한국에 수입해서 가르친 거죠. 그러니까 한국 신학의 광맥은 서구 신학, 특히 미국 신학이 뿌리라는 건데 그게 말이 됩니까. 서구 신학은 서구인들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의 신앙 고백이죠.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한국인들에 신학의 광맥은 그게 다일 수 없지요. 신학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기도하면서 자기가 느낀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자기의 이해와 통찰을 체계화한 것이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한국신학의 광맥은 오히려 다석 같은 분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신학 공부를 40년 했는데,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총체적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봤을 때 남의 것을 베끼고 남의 소리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지 않더라도 제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 신학입니다. 한국의 자생적 신학을 한 대표적인 분으로 단연 류영모를 꼽겠습니다.”
-다석의 좌우명인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仁)’ 중에서 일인(一仁)의 해석이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인이 늘상 걷는 것이라는 해석은 누구한테 나온 것인지요.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김 교수의 저서 ‘가온찍기’에서는 십자가의 살신성인(殺身成仁)에서의 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희생적 행위를 통해 인을 실현한 것에서 다석은 그리스도의 참된 의미를 발견했다고 했는데요. 이것이 일인의 해석에 더 적합해 보이는데요. 다석은 동광원 강의에서는 ‘성언 인’이라고 했어요.
“다석은 소리글자인 한글을 한문처럼 여러 의미를 가지는 문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독특한 천재성 때문에 끊임없는 논쟁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맥락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지요. 한 신학자가 하버드에서 내 논문을 가지고 발표를 했는데 한국어를 전공한 한 참석자가 한글은 표음문자인데 어떻게 그렇게 해석하냐고 질문해서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다석은 표음(表音)문자를 표의(表意)문자로 바꾸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동광원 강의에서 ‘성’은 몸이 성하다는 의미입니다. 몸을 비하하는 건 다석과는 거리가 먼 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석의 사유에 있어선 몸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다석의 숨신학과 몸신학은 선불교의 실천수행법인 참선 같은 인상을 줍니다. 다석의 숨신학 몸신학은 선도(仙道)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요. 그리고 몸신학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우선 ‘몸신학’ ‘숨신학’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독자들도 가끔 혼란스러워 하는데, 이 용어는 다석이 아니라 제가 창안한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다석을 선도 수행자로 보는 입장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김흥호 목사는 스스로 호흡 수련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나도 선도 수행을 오래 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다석의 글을 읽으면 머리에 잘 들어와요. 그렇지만 수행을 안 해본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도의 맥을 잇고 있는 국선도에서는 3가지 기본적인 수련이 있습니다. 첫째는 조신(調身), 둘째는 조심(調心), 셋째는 조식(調息)입니다. 조신은 몸을 성히, 조심은 마음을, 조식은 숨을 고르는 것입니다. 다석이 바탈을 닦는다고 말씀하실 때 단전호흡에 가까운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선도 수련에 중요한 성명쌍수(性命雙修)라는 말은 성(후천의 바탈)과 명(선천의 몸과 숨)을 동시에 수련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국선도는 성명쌍수 중 성의 수련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석 사상을 말할 때 보통 성 수련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몸 수련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석의 핵심 사상인 ‘빈탕한데 맞혀놀이’는 하늘의 움직임과 내 숨과 몸의 움직임이 공명(율려)해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석을 이해하려면 선도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인터뷰=황호택 논설고문· 정리=이주영 인턴기자>
<김흡영 교수 약력>
-1949년 출생
-1967년 경기고 졸업
-1971년 서울대 항공공학과 졸업
-1972년~73년 대한항공 근무
-1973년~83년 대우, 삼화 등 종합상사 해외주재원 근무
-1986년~87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신학, 교역학 석사
-1992년 GTU 철학 박사(신학 및 종교철학)
-1993년~2014년 강남대학교 신학과 조직신학 교수
-1997년 하버드 대학 세계종교연구소 선임연구원
-2002년~ 세계종교과학학술원(ISSR) 창립정회원
-2005년~ 한국과학생명포럼 대표
-2006년~2012년 아시아신학자협의회(CATS) 총회 공동의장
-2007년~2008년 일본 도시샤 대학 ‘유일신 종교 학제간연구소’ 등 선임연구원
-2012년~2013년 한국조직신학회 회장
-2020년~ 예일대학 종교와 생태포럼 자문위원
-저서로는 <道의 신학>(2000) <현대과학과 그리스도교>(2006) <道의 신학Ⅱ)(2012) <가온찍기>(2013) <왕양명과 칼 바르트>(2020) 등 영문 25권, 국문 14권이 있고 논문은 58편 이상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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