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재계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이날 오후 열린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에서 적격 대상자로 결정됐다. 이날 가석방심사위 심의 결과적격 대상이 된 810명을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즉각 허가, 이 부회장도 광복절을 이틀 앞둔 오는 13일 서울구치소를 나오게 된다. 이와 관련 삼성전자 측은 안도의 깊은 숨을 내쉬며 위기를 넘겼다는 반응이다. 특히 재계의 바람대로 이 부회장이 사면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임시석방된 것인 만큼 특별히 환영의 입장보다는 “다행스럽다”고 말을 아꼈다.
◆가석방 전화위복…반도체 패권 잡는다
삼성전자는 가석방을 전화위복 삼아 그동안 멈춰있던 투자에 속도를 낼 계획이다. 특히 파운드리 신공장 증설, 대규모 인수합병(M&A) 등에 속도를 내면서 이 부회장이 2019년 공언했던 '반도체 비전 2030'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비전 2030(이하 비전 2030)은 삼성전자가 이미 세계 1위인 메모리반도체뿐만 아니라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도 오는 2030년까지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다. 앞서 이 부회장은 2019년 4월 화성캠퍼스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이러한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오는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분야 R&D 및 생산시설에 133조원을 투자하고, 전문인력 1만5000명을 채용하겠다는 계획을 착착 추진해왔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부재로 인해 비전 2030은 사실상 올해부터 올스톱 됐다.
반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점유율 세계 1위 업체인 대만 TSMC는 올해만 최대 280억 달러(약 30조9000억원)를 설비투자에 쏟는다고 선언했다. 이는 전년 대비 62% 증액한 규모다. 사실상 유일한 파운드리 경쟁사인 2위(점유율 17%) 삼성전자가 총수 부재로 투자가 주춤한 사이 과감한 행보에 나선 것이다. 앞서 TSMC는 지난해 5월에는 120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주에 5나노미터(㎚) 공정의 신공장을 짓기로 결정, 오는 2024년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질세라 미국 인텔도 삼성전자와 TSMC를 따라잡기 위해 과감한 행보에 나섰다. 지난 3월 “파운드리 시장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한 뒤 4개월 만에 파운드리 세계 4위인 글로벌파운드리 인수에 나선 것이다. 약 300억 달러(약 34조3000억원) 규모의 막대한 인수가격이 점쳐지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인텔의 인수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 무엇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올해 들어 반도체 내재화를 강조하는 등 미국 정부가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여러 지원책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이 복귀한다면, 삼성전자도 반도체 패권 경쟁을 잡기 위해 더욱 과감한 베팅에 나설 것으로 예상한다. 이미 삼성전자는 올해 1~2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잇달아 “3년 내 대규모 M&A에 나설 계획”이라며 투자를 공언한 상태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의 올 상반기 영업이익만 20조원을 넘어선 상태라, 현금보유력은 TSMC와 인텔에 밀리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우리 정부가 추진 중인 'K-반도체 벨트 전략'과 관련, 기존에 발표한 비전 2030 투자액(133조원)에 38조원을 더해 총 171조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추가된 자금은 국내외 첨단 파운드리 공정 연구개발과 생산라인 건설에 집중될 예정이다. 지난 5월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서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은 “한국이 줄곧 선두를 지켜온 메모리 분야에서 경쟁자들의 추격이 거세지고 있다”며 “수성에 힘쓰기 보다는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해 선제적인 투자에 앞장서겠다”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의 복귀로 인해 미국 투자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지난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밝힌 미국 파운드리 공장 증설 관련 20조원의 투자도 본격적으로 현실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미국 오스틴 공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장 부지 선정을 추진해왔지만, 이 부회장의 부재로 현지 주정부 등과 주요 협상에서 속도를 내지 못했다. 내년 하반기 완공을 목표로 한 평택 3공장 건설도 속도를 낼 전망이다. 평택 3공장의 클린룸 규모는 축구장 25개 크기로, 현존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전자동 시스템으로 가동한다. 극자외선(EUV) 기술이 적용된 14㎚(나노미터) D램과 5나노 연산가능(로직) 제품을 양산한다.
◆대국민 사과서 약속한 '뉴삼성' 잰걸음
가석방 이후 이 부회장은 비단 투자 계획뿐만 아니라 4세 경영 종식, 무노조 정책 폐기 등을 담은 ‘대국민 사과’ 내용을 현실화하는 행보에도 나설 전망이다.
앞서 이 부회장은 2020년 5월 서울 서초동 삼성사옥에서 경영권 승계 및 노동조합 문제 등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는 그해 2월 신설된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권고에 따른 것으로, 이 부회장이 생중계되는 카메라 앞에 선 것은 2015년 ‘메르스(MERS)’ 사태 이후 5년 만이었다. 90도로 고개를 숙인 이 부회장의 사과 못지않게 내용도 파격적이었다. 이 부회장은 “자녀에게 경영권 승계를 하지 않겠다. 무노조 경영을 폐기하겠다. 노동 3권을 확실히 보장하겠다”고 공언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당시를 회상하며 “국정농단 사건,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 등으로 실추된 삼성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이 부회장이 최대한 몸을 낮췄고, 준법위 요구대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했다”고 했다. 이 부회장은 올 초 재수감 이후 첫 옥중 메시지에서도 "준법감시위가 본연의 역할을 다해달라"고 당부하며 준법 경영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 부회장의 사과 이후 1년이 지난 현재, 삼성 내부에서는 뉴삼성을 향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특히 무노조 경영 폐기와 관련해 삼성전자, 삼성디스플레이 등 주요 계열사들에 속속 노조가 설립됐다. 삼성전자는 오는 12일 창사 이래 첫 단체협약도 체결할 예정이다. 이를 바탕으로 조만간 2021년도 임금협상도 시작한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가석방이지만 총수의 복귀로 인해 삼성의 불확실성이 상당히 해소될 것”이라며 “장기간 8만원대에 머물러 있는 삼성전자의 주가 회복 가능성도 크다”고 기대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