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허리 역할을 하는 중견기업이 홀대를 받고 있다. 국내 중견기업은 전체 영리법인의 0.7%에 불과하지만, 우리나라 전체 고용의 14%, 매출 15%, 수출 17%를 차지한다.
높은 경제기여도와 달리, 국내 산업정책은 획일적 지원시책으로 중견기업 정책 체감 효과는 미미하다. 중견기업이 중소기업 회귀를 검토하는 ‘피터팬증후군’은 국내 산업정책에 중견기업이 얼마나 외면받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견기업이 ‘정부 정책 소외계층’으로 전락하면서 코로나19와 4차 산업혁명 시대 도래로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노출돼야만 했다. 중견기업의 58%는 연구개발(R&D) 조직‧인력이 없고, 60%는 내수중심 기업으로 기술개발과 글로벌 진출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업계에선 미래 대응이 시급한 때 정책적 부재로 인한 중견기업의 R&D 경쟁력 약화를 위험신호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 역시 “한국경제에서 제조‧기술‧일자리 핵심인 중견기업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일자리 창출 핵심 중견기업…작년 고용증가율 5.2%로 가장 높아
중견기업군은 일자리 창출의 핵심주체로, 지난해 고용증가율은 전년대비 5.2%를 기록했다. 대기업(1.6%)과 중소기업(0.1%)보다 높은 수치다. 청년채용도 증가하고 있다. 신규채용 중 청년층의 비중은 2018년 62.2%(18만명 중 11만2000명), 2019년 65.7%(21만1000명 중 13만9000명)다.
제조 중견기업 중 소재‧부품‧장비 기업은 84%다. 제조 중견기업이 중견기업 전체 매출액의 51.9%를 담당한다. 중견기업계 관계자는 “중견기업은 일본 수출규제 극복의 주역이며, 코로나19 등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대응하기 위한 소부장 산업의 핵심 기업군이자 위기의 버팀목”이라고 자평했다.
기업을 ‘피터팬’으로 만드는 정책부재…4차산업혁명‧코로나19 변화 속 위험신호 켜지나
중견기업 정책지원 큰 틀은 2014년 시행된 중견기업법으로 마련됐다. 하지만, 성장에 따른 부담과 걸림돌은 여전하다는 평가다.대표적인 게 ‘피터팬증후군’이다.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면 지원이 단절돼 중소기업으로 회귀를 검토한다는 의미다. 실제 중견기업이 되면 △공공기관 우선구매 △법인세 등 조세특례 △중소기업 적합업종 △중소기업 정책자금 등의 혜택에서 제외된다.
또 중견기업의 60.3%가 매출액 1000억원 미만 기업으로 미래 변화 대응에 한계가 있다. 중견기업의 58%는 현재 R&D 조직‧인력이 없다. 59.6%는 내수중심 기업이라 글로벌 진출과 기술개발 관련 지원이 절실하다.
중견기업계 관계자는 “변화된 경영환경 대응을 위한 투자 확대가 필요한데, 환경보전시설‧안전시설에 대한 공제율은 축소된 상황이다. 연구‧인력개발비 세액공제율 또한 감소하고, 제한적으로 지원받아 연구개발 투자 부담이 크다”며 “중견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 수출 등 해외진출을 위해 R&D, 설비투자가 필수적으로 관련 투자 확대를 위한 지원이 요구된다”고 했다.
“수출 중심 중견기업 집중 지원해 양질 일자리 만들어야”
“우리나라 경제 상황을 전투함에 비유하면, 항공모함(대기업)을 보유하고 있고, 초계함·어선(중소기업)도 많지만, 중대형 함정인 구축함(중견기업)이 부족하다. 삼성, 현대 등 대기업이 세계시장에서 인정받고, 중소기업·자영업자는 굉장히 많은데, 중견기업 수는 전체 기업의 1%도 안 된다. 항공모함과 연계해 작전을 펼칠 수도 있고, 독자적으로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구축함이 탄탄해야 글로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이홍 광운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중견기업은 ‘아픈 손가락’이다. 대기업과 같은 글로벌 경쟁력·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에 주어지는 온갖 혜택과 지원책은 배제된다. 기업 규제가 언급될 때는 중견기업이 빠지지 않지만, 스타트업에도 제공된 해외 진출 지원은 기대조차 할 수 없다. ‘대한민국 경제 허리’라고 불리지만, 언제나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중견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의 50년 뒤를 생각할 때 탄탄한 중견기업 육성에 경제정책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수출 확대, 기업 규모별 성장 사다리 구축을 위해서는 중견기업이 글로벌 수준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이 뒷받침 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홍 광운대 경영학과 교수는 “30년, 50년 뒤 미래를 생각했을 때, 중견기업이 취약하면 국가 경쟁력이 약화할 수밖에 없다. 중국만 해도 일부 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기업을 성장시킨다. 우리나라도 언제까지 몇몇 대기업이 전체 경제를 이끌 수 있겠나. 지금부터라도 미래를 이끌고 갈 수 있는 기업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며 “제조업 분야에서 매출 1000억~1500억원을 내면 중견기업에 들어가지만, 글로벌 관점에서 보면 중소기업에 불과하다. 애플이 어떻게 중소기업과 거래를 하겠나.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밸류 체인에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중견기업의 성장이 필수적이다”고 말했다.
‘대기업 아니면 중소기업’과 같은 이분법적 분류도 문제로 지적된다. ‘중견기업 성장촉진 및 경쟁력 강화에 관한 특별법’(중견기업법)이 시행된 지 7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정부와 국회에서는 기업 관련 정책을 만들 때 대기업 또는 중소기업 관점에서 규제·지원책을 수립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조병선 중견기업연구원장은 “중견기업법이 시행된 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대부분 법률과 정책은 ‘대기업은 규제 대상, 중소기업은 지원 대상’의 큰 틀로 짜여 있다. 중견기업에 대한 정책을 짜려면 법적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고용 측면에서만 분석해도 대기업·중소기업 일자리가 줄어드는 시기에 중견기업 일자리는 늘었다. 금융, 세제, 연구개발(R&D) 지원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신산업 분야와 수출 분야 중견기업을 집중적으로 지원해야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 청년들이 취업하고 싶어하는 중견기업의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되면서 일자리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소된다”고 조언했다.
최근에는 네이버, 카카오 등 스타트업에서 시작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나오고 있지만, 이는 극소수다. 창업-중소기업-중견기업-대기업으로 이어지는 체계적인 성장 사다리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국내 기업이 가지는 구조적 환경을 인식하고, 발상의 전환을 통한 획기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동기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카카오 같은 하이테크 기업이나 SM그룹처럼 적극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성장하는 회사도 있지만, 이는 극소수 사례다. 대기업과 다른 기업군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제도적으로 중견기업으로서 성장을 막는 장벽을 없애고, 적극적인 투자 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합리적인 정책이 나와야 한다”며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는 포스트코로나 시대에는 경영권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적극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기업 정책을 이념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미국·유럽 등 선진국 제도를 도입해 장기적으로 투자 중심의 성장 전략을 짤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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