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급한 업무를 보기 위해 수년째 와병 중인 어머니를 병상째 은행에 모셔갔습니다”
지난 8월 A씨(35)는 부친이 급작스레 변고했다는 연락을 받는다. 급히 상을 치른 직후 A씨는 부친 사업과 관련해 시급한 업무들이 있음을 알게 됐다. 이를 위해 그는 경기 지역 한 요양병원에서 수년째 거동이 불가능한 채 와병 중이던 모친에게 재정적 도움을 받고자 했으나 은행에서 지정된 후견인이 아니면 업무 처리를 위해 당사자가 와야 할 수밖에 없다는 안내를 받았다. 상담한 법무사 또한 후견인 지정까지 여러 달이 걸려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는 의견을 줬다. 결국 그는 사설 구급차를 불러 모친을 병상째로 요양병원 인근 은행까지 모신 후에야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금융 거래 등을 위해 후견인 지정이 신속히 필요한 보호자들이 기대에 못 미치는 후견인 심사 진행 속도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고령 인구가 급증하며 후견인 지정 심사 기간을 둘러싼 논란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성년후견인은 고령, 질병, 장애 등으로 인해 권한을 행사하기 어려운 개인을 위해 법적 대리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전국 법원의 후견개시사건 접수 건수는 2013년 약 250건에서 지난해 약 5250건으로 급증했다.
후견인은 가정법원 직권으로 선임된다. 성년후견개시심판은 통상적으로 접수, 관할, 후견인 결격 사유 확인, 선순위 추정 상속인의 동의 확인, 정신감정, 가사조사, 심문, 심판의 절차를 거친다. 심판에선 피성년후견인의 의사, 건강, 생활관계, 재산 상황과 성년후견인이 될 사람의 직업과 경험, 피성년후견인과 이해관계 유무 등의 사정이 고려된다.
시급한 법적 대리 권한 행사가 필요한 경우 임시후견인이 지정되기도 한다. 임시후견인은 청구인이나 관계인의 신청이나 법원 직권의 사전처분 결정으로 지정된다. 임시후견인의 후견사무의 범위나 대리권의 내용은 결정에 따라 다르지만 본인 재산 관리, 신상보호 사무에 제한적으로 결정된다.
임시후견인 자격을 원하는 관계인은 사전처분의 필요성과 그 내용을 적극적으로 소명해야 한다. 법원에서 인정이 되면 별도 심문기일 지정 없이 바로 임시후견인 선임 사전처분 결정이 내려진다. 다만 다툼이 있거나 구체적 내용 검토가 필요하면 법원이 심문기일을 열어 의견을 직접 청취한 후 결정을 내린다.
다만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다 보니 성년후견인 심사 기간은 통상 3~6개월 정도 걸린다. 시급할 경우를 대비한 임시후견인 제도 역시 한두 달 정도 소요된다.
전문가들은 앞선 A씨 사례와 같은 후견인 공백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선 지정 심사 속도를 더욱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는 만큼 신속한 심사 처리는 더욱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통계청이 지난 11월 발표한 ‘2020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800만명을 돌파했다. 인구 6명 중 1명이 노인인 셈이다.
이병찬 법무사는 “시급한 상황에서 조금 더 빨리 임시 후견인 지정을 해주는 것이 필요하지만, 현 제도에서는 임시후견인 지정이 가장 빠르다”며 “현행 제도를 개선하거나 현실적으로 힘들다면 실무에서라도 시간을 단축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임시후견인 제도 홍보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진우 상속 소송 전문 변호사(법무법인 승전)는 “급박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사전처분 절차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청을 못하거나, 시기를 그르치는 경우도 있다”며 “법원에서 청구인이나 관계인에게 임시후견인 선임 절차를 명시적으로 고지하거나, 임시후견인 선임 사전처분 필요성을 필수적으로 검토하는 등 법제 보완이 있으면 피성년후견인과 그 가족의 불편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가정법원 관계자는 “처리를 빨리 해주고 싶지만 절차와 인력의 문제가 있다”며 “서류가 완벽히 준비됐다 하더라도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고, 심문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후견 관련 사건이 폭증하고 있다. 반면 판사 배치는 ‘작년에 이런 사건이 많았으니 올해는 판사를 더 배치해야겠네’ 식으로 후발적으로 하다 보니 시장의 수요를 따라가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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