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트럼프는 공화당의 '짐'인가 '자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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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논설위원
입력 2022-12-05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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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전 대통령이 11월 15일 플로리다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2024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AP/연합]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달 미국 중간선거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2024년 대선 출마를 공식화했다. 그가 퇴임 후 1년 10개월 만에 정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공화당 입장에선 최악의 타이밍이다. 당 내부에서 그의 개입이 없었다면 주요 승부처에서 민주당에 낙승했을 것이라는 '트럼프 책임론'과 함께 다음 대선을 이기기 위해선 이젠 트럼프로는 안 된다는 회의론이 커지고 있다. 그의 조기 출마 선언이 탈세 의혹과 국가 기밀 문서 유출 등 각종 비리 혐의와 관련된 검찰 수사를 염두에 둔 '방패막이'로 인식되는 것도 공화당에는 큰 짐이다. 이젠 유력한 공화당 기부자들까지도 트럼프에 대한 지원을 망설이고 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지 일주일 후인 11월 22일 트럼프가 플로리다 마러라고 자택에서 인종차별주의자들과 회동한 이후 공화당 터줏대감 미치 매코널 원내대표까지 당내 비난 대열에 가세했다. 궁지에 몰린 트럼프. 그는 과연 거센 역풍을 뚫고 미국 정치적 역사에 새로운 신화를 쓸 수 있을까?   

정치적 경험이 백지였던 '아웃 사이더' 트럼프가 처음 대권 츨사표를 냈던 2016년으로 우리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트럼프는 공화당 경쟁 후보자들을 향해 정제되지 않은 원색적 언어로 비난을 쏟아내면서 곧장 언론과 대중의 시선을 장악한다. TV 방송사에 트럼프는 단기간에 시청률과 수익을 높여주는 흥미진진한 '서커스' 경선의 주인공이었다. 트럼프가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적 거친 발언을 일삼자 주요 언론매체들은 그가 얼마나 품위 없고 분열적이고 위험한 인물인지를 알리는 데 혈안이었다. 이런 식으로 트럼프는 돈 한 푼 안 쓰고 언론에 노출되며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렸다. 놀랍게도 그의 유세장은 매일 열광적 지지자로 가득했다. 그는 12명이 넘는 경쟁자들을 제치고 공화당 대권 후보를 거머쥐었다. 민주당은 트럼프와 같은 '괴짜'가 공화당 후보가 된 것을 내심 반기는 분위기였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트럼프 지지자 50%를 '한심한 종자'라고 매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돌풍은 본선 대결까지 이어졌다. 트럼프가 공화당 주류와 언론의 멸시를 조롱하듯 대통령에 당선되자 힐러리 캠프는 언론이 트럼프의 손아귀에 놀아났다며 망연자실했다.  

애초 공화당 주류의 눈에는 트럼프가 워싱턴 정가의 질서와 품위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통제불능식 막말과 언행으로 거침없이 상대방을 경멸하며 선거운동을 펼치던 트럼프를 지지자들은 부패한 엘리트 정치를 타파할 적임자로 환호했다. 당시 정치 신인 트럼프 돌풍에 대한 분석은 다양하지만 대체적으로 기존 정치권에 대한 미국인들의 혐오에서 출발한다. 특히 보수 백인 남성 하류층의 울분을 자신의 지지로 성공적으로 전환시킨 트럼프의 선거 전략은 주효했다. 다인종 사회인 미국에선 인종과 성별, 종교, 성적 지향, 장애, 소수 약자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이 엄격하게 금기시되는 일종의 사회적·문화적 규범이 광범위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소위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즉 소수자 차별 금지에 대한 미국 보수 백인층의 반감이 트럼프를 통해 일시에 표출된 결과로 해석하기도 한다.  

기존 정치인의 틀을 여지없이 깨버린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공화당은 사실상 트럼프의 당으로 빨리 진화했다. 그러나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는 고배를 마셨다. 이후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선거 사기로 당선됐다는 주장을 계속하면서 아직도 상당수 공화당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당선을 도둑맞았다고 맹신하고 있다. 트럼프는 2021년 1월 6일 자신을 지지하는 폭도들의 의회 난입 사건으로 여러 명이 사망한 뒤에야 정권 이양에 착수했다. 앞으로 미국 헌정 사상 가장 어두운 장면으로 꼽히는 의회 폭동 사태에 대한 조사에서 트럼프의 선동 혐의가 입증된다면 그의 정치 인생은 중대한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미국 정치의 분열을 부채질한 소위 '트럼피즘'이라는 극우 포퓰리즘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물론 트럼프는 확고한 고정 지지층과 막강한 자금 동원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가장 유력한 공화당의 대선 후보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난달 치른 중간선거 결과를 보면 공화당에서 트럼프의 영향력과 입지는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통적으로 집권당의 무덤으로 불리는 중간선거에서 그가 지지했던 후보들이 줄줄이 낙선되면서 기대했던 소위 공화당의 '붉은 물결'이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 인기가 별로이고 물가 상승률이 8%까지 치솟는 등 경제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도 공화당이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은 것은 트럼프 카드로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공화당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트럼프가 막판에 지원 유세를 다니면서 대통령 재선 도전 가능성을 노골적으로 밝힌 것은 민주당 지지층의 결집을 자극했다는 평가다. 

트럼프가 2024년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면서 공화당 내 떠오르는 잠룡들과 주도권 쟁탈전이 벌써 본격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44)는 이번 중간선거의 최대 승자로서 트럼프의 대항마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그는 플로리다 주지사 선거에서 19.4%포인트 차로 단순히 재선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이 승리했던 지역에서도 전세를 뒤집으면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트럼프의 집중 공략에도 함락에 실패했던 마이애미-데이드 카운티(Miami-Dade County)에서도 득표율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지난 대선에서 바이든은 라틴계 주민이 절대 다수인 이 지역에서 7%포인트 차이로 승리했는데 디샌티스는 이번 주지사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11%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승리했다. 이번 선거를 통해 디샌티스 주지사는  라틴계 유권자뿐 아니라 백인 노동자, 농부, 그리고 교외 지역 화이트칼라 등 폭넓은 지지층을 과시한 셈이다. 

트럼프의 참모들은 그의 대선 출마를 조지아주 상원의원 결선투표 (12월 6일) 이후까지 미루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부진한 중간선거 성적표로 침체된 당내 분위기를 일신하고 입지가 좁아진 자신의 처지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 서둘러서 발표를 강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마러라고 리조트에 모인 지지자들에게 "미국을 다시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 나는 미국 대통령에 출마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시종일관 청중을 휘어잡던 열정적인 연설과는 거리가 멀었다. 트럼프의 '입'으로 통했던 폭스뉴스는 35분으로 예정됐던 트럼프의 연설이 1시간 이상 지루하게 늘어지자 생방송을 중단하고 다른 뉴스를 이어갔다. 공화당의 거액 기부자들도 현장에 없었다는 점도 그의 영향력이 이전과 같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이든의 민주당은 트럼프의 2024년 대선 출마 선언에 대해 겉으로는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내심 반기고 있다. 둘로 극명하게 갈라진 미국 사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른바 '트나땡(트럼프 나오면 땡큐)'이라는 관점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선전을 이끌면서 자신에 대한 차기 대선 불출마 압박에서 벗어날  발판을 마련했다. 이번 선거를 공화당과 민주당 간 선택으로 프레임을 몰아간 바이든과 민주당의 전략이 먹힌 것이다. 한편으로 실망스러운 이번 선거 결과는 공화당에는 전화위복(blessing in disguise)이 될 수도 있다. 네바다와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애리조나 등 주요 경합 지역 유권자들은 2020년 대선이 사기라는 트럼프의 잘못된 주장을 신봉하는 '충성파' 후보들을 탈락시킴으로써 공화당이 트럼프의 막대한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었다. 중간선거 전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유권자의 60%가 바이든 대통령의 당선이 정당하다고 대답한 것을 보면 트럼프가 내세운 후보들이 선거에서 패배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이는 유권자들 대부분이 과거 수년간 거친 수사(rhetoric)와 음모론과 혼란의 늪에 빠진 미국의 민주주의가 정상화의 길로 가길 희망한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번 선거가 트럼프에게 거대한 패배로 인식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번 선거가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심판일 뿐 아니라 트럼프의 극단적인 선거 부정과 선동에 대한 강력한 심판이었기 때문이다

트럼프를 대신할 공화당의 '새로운 리더'로 부상하고 있는 디샌티스 주지사는 한때 트럼프의 지지자였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의 지원을 기피한 뒤 큰 표차로 승리했다. 트럼프는 중간선거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디샌티스가 대선에 나서면 "심하게 다칠 수 있다"고 말하는 등 견제에 나서고 있다. 이런 트럼프의 선제 공격을 두고 디샌티스는 '소음(noise)'이라고 일축했지만 아직 정면 대결은 피하고 있다. 나이가 40대인 그가 좀 더 때를 기다릴지 아니면 2024년 공화당 경선 후보에 뛰어들 것인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설혹 그가 다음 대선에 출마를 하기로 이미 결심을 했다 해도 발표를 서두르지 않고 페이스를 조절할 것으로 보인다. 2016년 트럼프가 처음 대선에 출마한 뒤 경선 후보들이 줄줄이 트럼프와 설전을 벌이다 진흙탕에 빠져 큰 낭패를 보았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동생 젭 부시 플로리다 당시 주지사는 뛰어난 정치적 자산과 배경으로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젭 부시는 경선 토론 과정에서 트럼프에게 일방적 공격을 받으며 후보를 사퇴했다. 

트럼프가 이 순간 가장 걱정해야 할 문제는 당내 자신의 흔들리는 입지나 선거자금 같은 문제가 아닐지 모르겠다. 최악에는 당국의 수사 결과 대선 후보 자격을 박탈당할지 모르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진정한 리더는 자신이 당이나 국가에 큰 짐이나 골칫거리(liability)가 되고 있을 때 이를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또 정치적 무대에서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오면 과감히 물러난다. 이는 이번 미국 중간선거에서 유권자들이 트럼프에게 보낸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2016년 처음 대선 도전을 선언한 이후 정치적 행보를 보면 이러한 메시지가 강하게 다가올 리가 없다. 아직도 그는 자신만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맹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년 5월 시작되는 공화당의 프라이머리에서 트럼프는 이번에는 방어자의 입장으로 바뀌어 경쟁 후보들과 난타전을 준비해야 할 듯하다. 

벌써부터 공화당의 주요 선거자금 후원자들이 트럼프 대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등 다른 후보군으로 관심을 돌리는 움직임이 있다지만 트럼프에 대한 일반 공화당원의 지지는 무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공화당 경선이 트럼프가 처음 대권 출사표를 냈던 당시와 같은 수준으로 TV나 유권자들의  흥미나 관심을 끌 가능성은 크지 않다. 트럼프가 공화당의 2024년 대선 후보 티켓을 거머쥐려면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그가 당에 큰 짐(albatross)이 아니라 소중한 자산(asset)임을 입증해야 한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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