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십년 동안 남북관계를 들여다보면서 느끼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 전쟁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보수나 진보 진영을 막론하고 우리 모두의 마음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믿음과도 같다. 문제는 그와 같은 절대 다수의 믿음이 딱 거기서 멈춰 있다는 것이다. “전쟁은 안 된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무슨 말일까? 평화를 지키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평화를 지키고 사랑한다는 것이 마음만으로 될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의지와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평화는 의지와 노력의 산물이다. 그런 의지와 노력이 일상으로 정착되어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의지가 강하지 않다. 노력이 등한시 될 때도 많다. “설마”라는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일까? “설마 전쟁이야 일어나겠어?”가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평화가 아닌 다른 일상에서도 이런 안이한 생각과 수없이 마주치게 된다. 최근 이태원 참사도, 과천 제2경인고속도로 방음터널 안 화재사고도 “설마 무슨 일 있겠어?”가 빚은 결과가 아닐까? 참사가 발생한 다음엔 소위 ‘뒷북’이라는 것을 친다. 이태원 참사 후 사람이 운집하는 곳에 경찰이 과도하게 배치되는가 하면, 과천 터널과 같은 방음터널을 전수 조사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지난달 26일 북한 무인기 5대가 남한 상공을 날아다녔던 다음, 취했던 조치들을 보라. 지상작전사령부와 각 군단, 공군작전사령부, 육군항공사령부 등이 공동으로 소형무인기 대응 및 격멸훈련을 진행했다. 공군 KA-1 전술통제기와 아파치·코브라 공격헬기, 20㎜ 벌컨포와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 ‘천마’ 등 지상과 대공 무기들을 동원, 대대적으로 훈련을 벌였다. 전형적인 ‘원님 행차 뒤 나발’ 격이다.
평화에 대한 믿음이 실천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북한을 대하는 데 있어 감정이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정착이 중심이 되어야 할 남북관계에 감정이 심하게 이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보수정권에서는 더욱 그렇다. 북한이 하는 짓은 모두 잘못되었기에 그것을 바로잡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북한을 악(惡)으로 규정,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평화적 공존의 대상이 바로 북한임에도 그 존재를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북한과 공동번영하자고 하면서도 그들과 타협하는 것을 오히려 굴종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북한 무인기 영공 침범 당시 대통령실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 상황도 아니었고 열 필요도 없었다”고 했다. 대신 북측에 2~3배 무인기를 보내고 북한 무인기를 격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맞대응(팃 포 탯·Tit for Tat)만을 생각하는 감정적 차원에서 나온 조치다. 먼저 왜 그와 같은 상황이 초래되었는지 보다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았겠는가.
2023년 새해가 밝았지만 남북관계에는 평화를 기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새해가 남북관계에서 가장 위태로운 미증유의 한 해로 점철될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평화 정착과 공고화를 위한 의지로 남북관계를 전개해도 부족할 판에 자존심 곧추세우기와 상호 군사적 위협만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의 미래비전은 사라진 지 오래다. '담대한 구상'에 대한 정부의 설명 자료를 보라. 통일을 향한 장기비전과 이에 걸맞은 전략은 보이지 않는다. 대북 정책은 ‘통일·평화·번영'이 아닌 ’비핵·평화·번영의 한반도'로 바뀌었다. 비핵만이 평화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비핵이 곧 평화창출 수단의 하나인데 압도적 군사 우위를 바탕으로 북한의 비핵화만이 이루어내야 할 전부인 것 같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압도적으로 우월한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는 국정최고권자의 말은 평화보다는 전쟁의 공포를 더 느끼게 한다. “북한의 어떤 도발에도 확실하게 응징, 보복하라”고 하면서 “북한에 핵이 있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주저해선 안 된다”고 했다. 이미 평화를 포기한 말이나 다름이 없다. 갑자기 소름이 끼치고 무섭기조차 하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가야만 할 길인지 묻고 싶다.
이대로 가다간 시쳇말로 ‘설마가 사람 잡을’ 형국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 한미연합훈련이 예고되어 있는 가운데 확장억제 실행력 강화에 따른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는 향후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을 가상한 실전 연습이 연중 전개되고, 최첨단 미사일 개발에도 속도를 낼 것이 분명하다. 고위력, 초정밀 타격 능력 향상을 위한 첨단기술 개발에 수많은 세금이 투입될 것이다. 북한 또한 핵 무력 고도화 질주를 계속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동안 북한은 핵 선제공격 법제화와 함께, 한·미·일 군사훈련 전개를 빌미삼아 전술핵 운용부대 훈련, 사상 첫 북방한계선(NLL) 이남 탄도미사일 발사, 화성-17형 ICBM 발사를 이미 고강도로 단행해 왔다. 지난 연말 전원회의에서는 “전술핵무기 다량생산”과 “나라의 핵탄 보유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릴 것”을 2023년 핵무력 강화 정책의 기본 방침으로 정했다. 600㎜ 초대형 방사포를 앞에 두고 김정은은 “남조선 전역을 사정권에 두고 전술핵 탑재까지 가능한 것”이라고 공언까지 했다. 남한은 이에 뒤질세라 ‘북한정권의 종말’을 공언한다. 그야말로 남북은 힘과 힘의 대결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다.
남북 사이에 국지전이라도 나야만 정신을 차릴 것인가? 우리 국민이 남북관계에서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전쟁발발의 공포 속에서 가슴 졸이며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정부가 할 일인가? 당장 남북한 모두 감정을 앞세운 협박과 엄포성 표현부터 거두어라. 감정적 표현은 적대적 감정만 부채질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대결적 상황을 진정시키는 냉철함부터 가져라. ‘전쟁은 안 된다’는 우리 국민 대다수의 신념을 실천으로 옮기는 첫걸음이 바로 이것이다. 북한의 비핵화에만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전략적이지 못하다. 상대가 내 마음에 들어야만 내가 행동하겠다는 것은 하수(下手)가 하는 짓거리다. 상대가 내 마음에 들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고수(高手)다운 행동이 아닌가. 자존심 대결보다는 한반도의 평화를 먼저 생각하라. 전쟁이 나면 그동안 피땀 흘려 쌓아올렸던 모든 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2023년 업무추진의 방향과 관련,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도발을 멈추도록 꾸준히 설득하며 남북당국 간 접촉이 시작되도록 만들 것이다“ 더 나아가 "북한이 대화를 선택하고 당국 간 접촉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반 여건을 바꿔 나갈 것"이라고 했다. 제발 속빈 강정과 같은 말만 되풀이하지 말고 당장이라도 실천할 수 있는 전략을 만들어 제시하기 바란다.
김영윤 필자 주요 이력
▷독일 브레멘대학 세계경제연구소 연구원 ▷통일연구원 북한경제연구센터 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