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 가능성을 시사하고 중국의 역린인 대만 문제를 전 세계적 사안으로 규정하면서 한국 정부가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강조하면서 미국과 동맹관계에 한층 밀착하는 현 정부의 외교 전략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다원적인 외교의 전략적 유연성을 버리고 미국을 향한 일방적인 외교관계로 국익을 챙기겠다는 발상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자신의 패를 보여주며 협상하는 파트너에게 이익을 양보할 만큼 외교환경이 우호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 유연성은 국익을 지키기 위한 발상의 소산으로서 지금까지 일관되게 유지된 우리 정부의 기본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일방적인 가치외교 전략이 국익에 부합한다는 주장은 모순처럼 들린다. 이러한 전략적 단순성은 대통령의 안이한 역사인식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현재와 미래의 국익을 위하여 과거사는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역사적 과정의 산물로서 현재를 인식하는 대신 미래로 가는 시점에 위치한 현재만을 강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의 자유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찬양은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뉴라이트적 인식을 토대로 보수의 표심을 자극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러한 대통령의 역사인식이 사회적 분열을 조장하고 외교적 고립과 국익 훼손을 자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히 우려스럽다.
현 정부의 강제동원 배상 해결책은 과거사 청산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명백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정부가 제시한 제3자 병존적 채무 인수’(제3자 변제) 방안은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포스코 등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수혜를 입은 한국기업으로부터 출연금을 받아 2018년 대법원 확정판결로 승소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양국의 경제단체들이 (가칭)‘미래청년기금’을 조성하는 참으로 기이한 내용을 추가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흐려 놓았다.
침략국 기업의 강제동원에 따른 개인의 피해 배상은 역사적 판결과도 배치되는 엉뚱한 해법이다. 나치의 사례를 보자. 전후 독일 정부는 전쟁 피해국들과 개별 협정을 맺어 국가 차원에서 배상했다. 그러나 강제노역에 대한 피해 배상은 별개였다. 개인적인 피해 배상을 제약한 ‘런던채무협약’을 근거로 독일 정부도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하지만 1998년부터 미국 유대인들이 독일 기업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하면서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독일 정부와 기업들은 각각 50억 마르크씩 출연해 '기억·책임·미래 재단'을 만들어 강제노역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에 따라 재단은 일본인 3명을 포함하여 89개국의 165만여 명에게 44억 유로를 지급했다.
제주 4·3항쟁의 기억 지우기도 같은 맥락이다. 대통령 후보 윤석열은 광주, 제주, 안산을 찾아 역사적 갈등을 봉합하면서 사회통합적인 메시지를 던졌고, 사람들은 선출직 정치인 경험이 전혀 없는 후보를 색다르게 평가했다. 그러나 집권 1년이 다가오는 오늘, 그의 행보는 극우적 색채에 가깝고 대화와 협치 대신 극단적인 편가르기 정치로 일관한다. 대통령은 올해 4·3기념식을 찾는 대신 대구 서문시장을 찾아 이를 입증했다.
윤석열 정부의 기억정치는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지난 4월 초 국가보훈처가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발표했다. 해당 기념관이 대통령 기념관이 아니라 독립유공자 이승만을 기리는 사업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이승만을 둘러싼 역사적 평가와 국민 정서를 고려할 때 대통령 기념관의 관철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현 정부의 판단이 깊게 서려 있다고 보인다. 정부 스스로 우회로를 선택하면서까지 굳이 이승만기념관을 건립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집요한 기억투쟁의 일환으로서 뉴라이트 역사인식을 토대로 현 정부가 보수의 중심지를 생성하려는 목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의심은 최근 집권 세력 인사들의 정치적 행보와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 보수세력은 총선 때에만 보수를 참칭할 뿐 사실상 극우와 동의어다. 극우의 역사관 저변에는 뉴라이트가 있다. 그들은 조선의 멸망 원인을 일제의 침략보다는 내부의 요인에서 찾는다. 그럼으로써 일제의 침략을 식민지 근대화로 포장한다. 일제의 자양분 위에 성장한 친일세력이 대한민국을 열었고, 친일세력이 주류가 되었음을 역사에 기록하고 싶어한다. 그 절정에 이승만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국민을 향해 총을 쏜 독재자였고, 국민의 손으로 끌어내린 대통령이었다. 대한민국 헌법이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이승만의 기억 부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지만 물방울로 바위를 뚫겠다는 듯 뉴라이트의 기억투쟁은 오늘도 계속된다.
과거사 정리에 대한 독일의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저는 오늘 여러분 앞에 서서 독일인이 이곳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 80주년 기념식에서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다시 한번 독일 나치군의 유대인 학살 만행에 대하여 역사적 사죄를 구했다. 앙겔라 메르켈(보수 기독교민주당)의 말을 되새겨보자. “우리는 기억을 보존하고 이어가야 한다.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독일의 정치인들은 왜 주변국과 전쟁 당사국에게 끊임없이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고 실행할까? 통일·평화·국익! 이 세 가지 명분이다. 주변국과 갈등을 빚는 한 독일은 이 명분들을 지킬 수 없음을 오래전부터 터득해 왔다. 덕분에 통일은 이미 달성되었다. 그러나 평화와 국익은 영원히 지속되는 과제이다. 평화와 국익을 지키기 위하여 여야를 가리지 않고 어제의 과오를 반성하는 독일 정치인의 자세, 이게 정치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선서에서 사회통합적인 메시지를 강하게 던졌다. 정치 초보 대통령에게 거는 국민의 기대는 안전한 나라, 평화로운 나라였다. 그러나 취임 1년을 맞아 그는 일방적이고 편협한 노선을 걷고 있어 국민은 위험한 나라로 전락하는 대한민국을 우려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대통령의 이념이 자유와 자유민주주의에 경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국익과 안보를 해치는 수준이어서는 곤란하다.
그 어느 때보다 전략적 유연성이 필요한 때다. 이는 미·중 갈등, 우크라이나 전쟁의 와중에도 중국을 상대로 부단히 외교를 펼치는 서방국가들의 태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연금개혁으로 내홍을 겪는 마크롱의 중국 방문은 외교적 성과는 물론 국내 정치를 돌파하는 전략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뒤를 이은 브라질 대통령 룰라의 중국 방문은 더욱 의미심장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룰라는 양국 간 무역에서 위안화 결제를 타결하여 달러 패권주의에 균열을 내면서 미국에 맞선 다자주의 강화에 나서 거대 시장인 중국과 경제협력을 이끌어냈다. 심지어 미국마저 경제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적어도 외교적 수사에서는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갈등 국면에서 동맹국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한다.
우리 정부 역시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와 보다 현명한 외교관계를 고민하고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할 때다.
△연세대 사학과 졸업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2021년 5월부터 한국 대학체제의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삼각지연구팀’에 참여, <대학법체제정비>(2021)와 <고등교육 패러다임 대전환을 위한 대학정책>(근간) 공저 △교수신문 기획연재 '대학법과 대학의 미래'의 책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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