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의 침체국면이 길어지고 있다. 정부는 중국시장과 반도체 수출 회복 등 시장요인에 의존한 채 4분기에는 회복세가 강해질 것이라는 심리전만 펴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한국경제는 중장기적 축소압력을 세 방향에서 받고 있다. 해외로부터, 정부로부터, 그리고 민간으로부터.
미국은 ‘한미경제동맹’의 이름으로 한국경제의 성장동력을 자국의 제조업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보조금 지급을 약속하면서 억지로 유혹하고 있다. 윤석열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바이든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먼저 한국을 방문하면서 ‘가치 기반 공급망 재편’을 표방했지만 성장, 수출, 고용의 측면에서 한국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퍼주기 재편’이다. 게다가 이행과정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약속 불이행과 새로운 조건 제시로 한국에 갈수록 불리해지는 모습이 뚜렷했다. 2021년 바이든 정부가 출범한 이후 금년 초까지 한국기업의 대미 투자는 1000억 달러를 넘어 외국기업의 대미투자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의 제조업 부흥이 철저하게 한국경제의 희생 위에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의 성장, 수출, 일자리, 소득이 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한국경제를 위축시키고 있다. 기재부는 건전재정의 입법화를 요구하지만 법이 없는 지금의 ‘재정건전’만으로도 한국경제를 크게 위축시킬 우려가 크다. ‘세금을 걷지도 않고 쓰지도 않겠다’고 시위하고 있다. 금년 상반기 정부의 재정집행이 55%에 불과하다. 당초 예산 639조원 중 65%를 조기집행하겠다는 예고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재인 정부의 60%에도 미치지 못한다. 지난해 55.1%였던 6월말 세수진도율도 올해는 44.6%에 지나지 않는다. 연 44조원 규모로 예상되는 세수공백을 일시 차입과 재정증권 발행으로 메우고 있다. 그래서 상반기 일시차입금에 대한 이자만 1141억원 지급했다. 세수 공백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감세 기조를 강화하고 있다. 결국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국면에서 경기침체를 더욱 부추겨 마치 성장, 일자리, 소득을 억누르는 정책목표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수 부족에도 재정건전성을 위해 적자국채를 발행하지 않으려면 지출을 억제하는 길밖에 없다. 가장 큰 피해자가 엉뚱하게도 미래 성장동력을 책임지는 과학기술예산이다. 연구개발은 성장률 하락으로 세수가 감소하여 재정건전성이 위태로워질 때에도 가장 나중에 축소하거나 재정적자로 감당해야 하는 항목이다. 한국 정부는 IMF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연구개발 예산을 줄이지 않고 오히려 늘렸다. 현 정부도 당초에는 5년간 175조원을 투자해서 2030년 과학기술 5대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전략을 3월 초 세웠다가 갑자기 반년 만에 반전된 셈이다. 다년간 로드맵에 따라 수행되던 과제가 대폭 삭감되면 ‘노벨상의 꿈’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접을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연구는 미래를 위한 투자이기 때문에 확대로 인해 재정적자가 발생해도 재정건전성 판단에는 악역향을 미치지 않는다. 정부의 ‘빚투’는 침체국면에서 권장사항이다. 과학기술계의 반발이 거세자 정부는 ‘젊은 과학자 지원 확대’라는 낯익은 갈라치기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부가 건전재정에 진심이라면 첫걸음은 예산총액의 축소가 아니라 불요불급한 항목의 정비여야 한다. 첫 번째 대상은 검찰도 숨기고 싶어하는 특수활동비와 같은 비생산적인 ‘눈먼 돈’이다.
정부가 잼버리 스캔들을 이유로 새만금 개발예산을 대폭 삭감한다면 그것은 원인조차 아직 불분명한 부실을 이유로 불의를 강요하는 것이다. 정부가 원하든 원치 않든 정부의 새만금 SOC 예산의 대폭 축소는 새만금 2차전지 특화지구의 원만한 추진을 방해하여 지난 8월 2일 윤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2차전지 투자협약식을 무색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SOC투자는 아랫돌과 같다. 새만금 SOC 건설이 지연되면 6조6000억원의 투자약속이 이행될지 장담할 수 없게 된다. 2차전지 산업은 군산 전기자동차 생산 활성화라는 즉각적인 간접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반도체산업 육성에서 소외된 전북에게 2차전지 산업은 지역소멸에서 구제해 줄 산업이다. 풍력발전단지가 조성되어 RE100 기준을 충족시키는 데도 어려움이 없다. 중국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에도 최적일 뿐만 아니라 중국시장에 진출할 기업의 입지로서도 최적이다. 새만금 2차전지 특화단지의 조성이 예산삭감으로 지연된다면 균형발전은 물론 국민통합의 관점에서도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주었다가 빼앗는 것은 처음부터 주지 않은 것만 못하다.
민간부문에 의한 한국경제의 위축은 그동안 자본수출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노무현정부 당시부터 급증하기 시작한 개인과 기업의 해외투자는 매년 수백억 달러 규모로 성장하고 있다. 작금의 성장 정체와 일자리 창출 부진의 상당 부분은 정부가 민간의 해외투자, 자본유출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상품과 함께 공장 자체가 수출되는 현상이 빈번해지면서 성장, 일자리, 가계소득에 대한 우려가 더 깊어지고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전쟁과 함께 군비확장이 추세로 자리잡으면서 주목을 받고 있는 K방산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한국경제에게 외국인 투자유치는 거의 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진국마다 불고 있는 ‘리쇼어링’ 바람도 한국은 스쳐 지나가는 모양이다. 기재부가 9월 18일 발표한 ‘첨단산업 글로벌 클러스터 육성방안 후속조치 계획’에 따르면 ‘글로벌’의 실제 내용은 기업형 벤처캐피털의 해외투자 비율을 총자산의 20%에서 30%로 확대하고 소부장 외투기업에 대한 지원을 2000억원으로 확대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국내기업의 해외투자를 ‘경제안보’와 공급망 내재화의 관점에서 어떻게 조율할지에 대한 문제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무엇보다 리쇼어링을 지원하기에 앞서 한국 기업의 해외투자를 국내투자로 전환하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나가 있는 기업이나 공장을 불러들이기보다는 나가려는 기업을 붙드는 데 드는 힘이 덜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내투자환경 개선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 국가 브랜드이다. 독일의 4차산업혁명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바탕에는 국가 브랜드 ‘메이드 인 저머니’가 있다. 소비자가 품질에 신뢰를 부여하면 높은 가격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높은 임금을 지불할 여력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높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돌아오거나 계속 머물려면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품질과 소비자 신뢰, 그리고 ‘메이드 인 코리아’ 국가 브랜드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독일 브레멘대 경제학 박사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교수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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