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아오키 교수의 예측이 들어맞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일본 경제가 수십 년 만에 깊은 무기력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올해 일본은 30여년 만에 가장 빠른 물가 상승세를 보였다”며 “오랫동안 정체된 임금은 1990년대 이후 어느 때보다 빠르게 상승 중”이라고 짚었다. 이어 “물가와 임금 상승세는 글로벌 공급망 충격이 주도했다”면서도 “이런 외부 충격과 일본 내부의 제도 및 세대 변화는 일본의 경제 궤도를 바꿀 기회”라고 전했다.
'잃어버린 30년'서 벗어나나
일본 경제는 지난 30년간 암울했다. 구매력평가지수(PPP)를 기반으로 계산한 세계 국내총생산(GDP)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9%에서 오늘날 4% 미만으로 떨어졌다. 골드만삭스는 현재 세계 3대 경제 대국인 일본이 2050년께 세계 5대 경제 대국, 2075년에는 10대 경제 대국에서 서서히 밀려날 것으로 예상했다.일본의 올해 3분기(7~9월)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0.5%다. 이런 추세가 1년간 이어진다고 가정해서 산출하는 연율 기준으로는 -2.1%다. 현재 추세가 계속 이어질 경우, 결국 역성장한다는 의미다. 엔저로 인해 일본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독일에 역전돼 세계 3위에서 4위로 밀려날 것으로 예측된다. 일본증시 토픽스500에 상장된 기업 중 40% 이상이 장부가치 이하로 거래된다. 미국 S&P500에 상장된 기업의 경우 이 비중이 5% 미만에 그치는 것과 대조된다.
그러나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이 인플레이션 기대치를 재설정하고 기업의 역동성을 촉발한다면 추락을 멈출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 해외 투자자들은 올해 일본을 주목했다. 모건스탠리는 일본이 30년 간의 경기침체에서 벗어났다고 평했고,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은 일본 기업 주식을 대거 사들였다.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0월 방일 중 “일본은 놀라운 경제 변화를 겪고 있다”고 평했다.
도쿄대의 호시 다케오 교수는 “최근 수십 년 간 일본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역동성”이었다며 “새로 설립된 회사는 너무 적었고, 오래된 회사는 너무 많았으며, 물가는 거의 변하지 않았고, 인재들은 평생 회사에 갇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이러한 것들이 바뀌고 있다"고 강조했다.
우선 물가 변화가 두드러진다. 수입 비용 상승 등으로 연간 헤드라인 인플레이션은 18개월 연속 일본은행(BOJ)의 목표치인 2%를 초과했다. 일본 기업들은 상품 가격 인상을 꺼리는 경향이 있으나, 올해를 기점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음료 제조업체 산토리의 니나미 다케시 최고경영자(CEO)는 “이제 우리는 가격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미·중 경쟁 등 지정학적 긴장도 일본 경제의 궤도 변화를 이끌고 있다. 미국은 한때 일본을 경제적 경쟁자로 인식했지만, 지금은 대(對)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과의 협력 강화를 도모한다. 일본 국영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와 미국 IBM이 2나노 공정 반도체 개발을 위해 손잡은 게 대표 사례다.
세대 변화도 두드러진다. 일본 증권사 모넥스 그룹에 따르면 닛케이 상장 기업 CEO의 평균 연령은 지난 10년 동안 12세나 낮아졌다. 평생 고용 및 연공서열로 상징되는 무사안일주의를 뛰어넘은 젊은층이 창업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스타트업 생태계도 서서히 온기를 느끼고 있다.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2013년 880억 엔(약 7700억원)에서 2022년 8770억 엔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일본 벤처 캐피털 펀드 수는 4배로 늘었다.
물가-임금 선순환…내년 춘투에 달렸다.
이코노미스트는 내년 봄 열리는 임금협상인 '춘투'에서 임금이 큰 폭으로 오른다면 물가 상승과 임금 인상의 선순환 고리가 살아날 것으로 기대했다.지난 30년 간 일본의 임금 수준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일본의 실질임금은 2022년 기준으로 4만1509달러로, 1991년 4만379달러와 큰 차이가 없다. 반면, 한국의 실질임금은 같은 기간 2만5149달러에서 4만8922달러로 2배로 뛰었다. 30년 전 임금 수준이 절반이었던 한국이 일본을 앞지른 것이다.
일본 경제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임금 인상이 필수인 셈이다. 실제 일본 정부는 '임금 인상→소비 촉진→물가 상승→기업 실적 개선→추가 임금 인상'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고리를 되살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통화정책을 운용하는 일본은행은 이러한 물가-임금 선순환이 살아날 때까지 초완화적 통화정책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이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임금 인상을 통해 내수가 주도하는 물가 상승이 나타날 것이란 확신이 들 때까지 초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17일 의회에 출석해 "인플레이션은 2025 회계연도까지 인플레이션 목표인 2%를 향해 점진적으로 가속화할 가능성이 높다”면서도 “이는 긍정적인 임금-물가 고리를 동반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가 상승으로 오른 생활비를 감당할 수준으로 임금이 올라야 소비가 살아나고, 활발한 소비가 다시 물가를 자극할 것이란 생각이다.
로이터통신은 일본 주요 기업들이 내년에 임금을 크게 올릴 계획인 점에 비춰, 일본은행이 초완화적 통화정책을 종료하기 위한 출구 전략을 짤 것으로 예측했다. 주류·음료 제조업체인 산토리 홀딩스는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월평균 임금을 7% 올릴 계획이다. 보험사인 메이지 야스다 생명보험은 내년 4월부터 직원 1만명의 연봉을 평균 7%, 전자제품 유통회사 빅카메라는 정규직 4600명의 급여를 최대 16% 인상할 예정이다.
일본 최대 노동조합인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렌고)는 올해 임협에서 5% 안팎의 임금 인상을 요구했고, 그 결과 30년 만에 가장 높은 인상률인 3.58%를 끌어냈다. 렌고는 내년에 5% 이상의 임금 인상을, 일본 최대 산업별 노조인 UA젠센은 6%에 달하는 인상을 요구할 계획이다.
로이터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경제학자 10명 중 6명은 2024년 일본 주요 기업들의 임금 인상 수준이 올해 인상 폭을 웃돌 것으로 예상했다. 다케다 아쓰시 이토추 경제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인플레이션, 타이트한 노동 시장, 기업 이익 상승 등으로 임금 인상 모멘텀이 유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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