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독립유공자 공적의 심층 재검증에 나선 지 1년이 지났지만 서훈 사례는 아직 없다.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이 뚜렷하지만 친일 논란이 있는 동농 김가진 선생(1846∼1922)처럼 서훈받지 못한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보훈부 관계자는 29일 “(보훈부) 특별분과위원회는 각 분과위에서 심층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사안 등에 대한 심사를 진행하지만, 특별분과위가 생긴 후 현재까지 서훈된 사례는 없다”고 밝혔다. 보훈부는 지난해부터 독립유공자 포상을 위한 특별분과위를 운영 중이다. 예비 심사 격인 제1공적심사위원회와 본심사인 제2공적심사위 등 2심제에 특별분과위가 추가돼 3심제로 확대됐다.
보훈부 관계자는 “김 선생에 대해 1993년 유족의 포상 신청 이후 지금까지 총 8차례 심사를 진행했으며 행적 논란의 사유로 포상을 보류했다”며 “현재까지 김 선생에 대한 (서훈) 추가 심사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김가진 선생은 고종 서거 후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 총재가 됐다. 대한제국 대신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중국 망명까지 감행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고문을 지냈다.
김 선생의 아들 부부, 대동단원 80여 명은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았다. 하지만 김 선생에 대한 서훈은 30년 동안 8차례나 거부됐다. 의병을 탄압하고 일제가 주는 남작 작위를 받는 등 친일 행위가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김선현 동농문화재단 이사장은 “김 선생은 정부의 정통성과 법통을 지닌 임시정부로 망명해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고문으로 추대됐다”며 “서훈을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도 “김 선생은 임시정부에서 최고 원로로 대접받았고 독립운동가들이 평가한 최고의 독립운동가였다”며 “당연히 서훈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3·1운동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1919년 10월. 허름한 한복 차림의 노인과 청년이 기차에 몸을 실었다. 두 사람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신의주를 거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닿았다. 동농 김가진 선생(1846~1922)과 그의 아들 김의한(1900~1964)이었다.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을 이끌던 김 선생이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망명길을 택한 것이다.
구한말 주일본판사대신, 병조참의, 공조판서 등을 지낸 거물급 인사였던 김 선생의 망명은 당시 임시정부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었다. 김 선생은 고종의 최측근으로 대한제국 대신 중 유일하게 상해 임시정부 망명까지 감행했다. 임시정부 고문으로 항일투쟁도 전개했다. 하지만 조선 망국에서 초기 독립운동으로 이어진 격동의 시대, 최일선 현장에서 활약한 김 선생은 논란의 인물로 남아있다.
조선민족대동단 총재·임시정부 고문 추대…장례도 임시정부장으로
김 선생은 1846년 서울에서 현재 외교부 장관 격인 예조판서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7년 과거에 급제한 뒤 홍문관 부수찬, 농상공부대신, 법부대신 등을 역임했다. 1909년 대한협회 회장에 올라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는 애국계몽 운동가로 활동했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긴 경술국치 당시 일제가 준 남작 작위를 공개적으로 거절하지 못했지만 이른바 은사금(恩賜金)은 거부했다.
김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조선민족대동단을 조직하고 총재를 지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같은 해 아들과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했다. 당시 일제는 “대한제국 관료나 조선왕족은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경술국치를 찬성하고 있다. 임시정부는 부랑아들이 모인 단체”라고 깎아내렸다. 그러나 대한제국 대신인 김 선생이 임시정부로 망명한 뒤 고문으로 추대되자 일제의 거짓이 드러났다. 이 일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세우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김 선생은 같은 해 11월 33명이 이름을 올린 제2의 독립선언서(대동단 선언)를 작성해 발표했다. 1920년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모금에 매진했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김 선생은 1922년 7월 상하이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상해에서 임시정부장으로 치러질 정도로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았다.
김 선생의 독립운동은 대를 이어갔다. 상해 망명 때 동행한 김의한 선생은 김구 선생의 비서를 지냈다. 며느리 정정화 선생은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6차례 조달한 밀사였다. 2022년 8월 별세한 손자 김자동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을 지냈다.
김 선생의 아들 부부와 대동단원 등 80여 명은 서훈을 받았다. 반면 김 선생은 남작 작위 수여, 의병 탄압 논란 등의 이유로 서훈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100년 넘게 김 선생의 유해 송환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조국 독립을 위해 온 집안이 싸웠지만 김 선생은 죽어서도 만나지 못하는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김 선생은 상해 송경령능원에, 아들은 북한 재북인사묘에, 며느리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상해 송경령능원은 중국에서 국립보훈시설”이라며 “우리 정부가 중국 정부에 공식으로 요청해야 김 선생의 유해를 모셔올 수 있다. 김 선생에 대한 서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22년 김 선생 사망 100주기 이후 그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거세게 일고 있다. 김 선생 서거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당시 이규수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교수는 “동농에 대한 재평가는 시대적 사명”이라고 힘줘 말했다.
윤상원 전북대 교수는 “독립운동을 하다 전향해 친일행위를 하는 이들은 많이 봤지만 이미 호의호식하고 있는데 이를 모두 버리고 독립운동의 길로 뛰어든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윤 교수는 “개인의 선택이었지만 그 결과는 집안 전체의 고통이었다”고 덧붙였다.
이종찬 광복회장도 “김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모인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했던 쟁쟁한 분들이고, 일본이라면 치를 떠는 분들”이라며 “그분들의 김 선생에 대한 평가가 이미 있는데 그것을 고려하지 않고 별도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했다.
보훈부, 특별분과위 신설 운영…“김가진 서훈 추가 심사 계획 없어”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서도 독립유공자 공적 재검증을 위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보훈부는 지난해 7월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 운영 규정을 대폭 손질했다.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는 보훈부 장관이 독립운동의 공로가 있는 사람을 건국훈장·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 대상자로 추천하기 위해 설치·운영하는 기구다.
특히 보훈부는 공과(功過)가 함께 있는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도 정책연구와 토론회 등을 거쳐 재평가 방안이 있는지 들여다본다는 방침이다. 친일 행적이 있어도 독립운동을 했다고 인정받는 ‘선 친일, 후 독립운동’ 인사들에 대한 서훈을 재검토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김 선생이나 조봉암(1898∼1959) 선생처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행적이 분명함에도 친일 행적 등 논란으로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한 이들도 서훈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보훈부는 독립유공자 포상을 위한 제1공적심사위원회와 제2공적심사위 외에도 3심 격인 특별분과위원회를 신설해 운영 중이다. 특별분과위는 심층 논의가 필요한 사안만 논의한다. 친일 논란이 있는 김 선생에 대한 건도 특별분과위에서 다룬다. 하지만 특별분과위가 만들어진 뒤 서훈된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보훈부는 1993년, 1995년, 2000년, 2001년, 2006년, 2014년, 2019년, 2022년 총 8회에 걸쳐 김 선생의 서훈 보류를 통보했다. 보훈부 관계자는 “현재까지 김 선생에 대한 추가 (서훈) 심사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동농문화재단은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 기준에 비춰 보더라도 김 선생이 서훈을 받아 마땅하다는 입장이다. 김선현 동농문화재단 이사장은 “대동단의 총재와 임시정부·북로군정서 고문으로 항일독립운동을 개진했다는 점과 임시정부가 당대에 공로를 인정한 점, 대동단의 일반 단원 중 약 80명이 서훈을 받은 점 등을 보더라도 당연히 김 선생에 대해 서훈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 이사장은 “친일을 하는 이유는 대부분 재산을 지키고 안락한 삶을 누리기 위한 것”이라며 “재산을 일제에 빼앗기고 중국으로 망명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한 김 선생에게 친일의 누명을 씌우는 것은 후대 사회에 매우 나쁜 선례를 남기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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