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나를 걸겠다. 절대 도망가지 않겠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2005년 기아차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 처음 했던 말이다. 정 회장의 시작은 다른 2세들과 달랐다. 든든한 조력자를 둔 아버지의 뒷배로 그룹사 주요 요직에서 비교적 편안하게 데뷔전을 치른 비슷한 또래의 오너들과 달리 정 회장은 사업 존폐 위기를 겪던 기아의 사장으로 출발했다.
당시 기아는 품질 문제로 수출 수익성이 지속적으로 하락해 누적 적자만 수천억원에 달하는 적자 기업이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기아 수장으로 취임한 정 회장은 수천명의 임직원들 앞에서 '낙하산 오너'가 아니라 실력으로 인정받는 '진짜 경영인'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그의 다짐은 19년이 지난 지금 현대차·기아를 글로벌 3위 완성차 업체로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자동차산업 불모지에서 태어난 현대차그룹은 3대를 거치는 동안 '단순 제조사'에서 '모빌리티를 통한 인류의 행복'이라는 '꿈'을 파는 기업으로 한 차원 도약했다. 후손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동차 산업을 뿌리 내리고자 했던 "이봐, 해봤어?" 정신의 1대 고(故) 정주영 선대회장, 국내외에서 '흉기차'라는 조롱을 받았지만 묵묵히 품질경영을 이끌어온 2대 뚝심의 정몽구 명예회장을 거쳐 이제 3대 정의선 회장의 목표는 '인류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한 한 차원 높은 삶'으로 향하고 있다.
'패스트 팔로우' 전략을 추진하던 만년 2등 기업에서 글로벌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류의 행복을 위해 정진하는 '퍼스트 무버'가 되기까지, 정 회장의 성공 원동력과 앞으로의 과제를 살펴본다.
◆험지에서 출발한 야성의 CEO...위기를 기회로 만들다
4일 재계에 따르면 정의선 회장을 만나본 이들은 공통적으로 그에 대해 "야성의 눈빛이 살아있는 몇 안되는 오너"라고 평가한다. 맨땅에서 출발한 1대 오너와 달리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해외에서 공부한 재계 3세들에게는 '생과 사의 치열함'을 찾아볼 수 없는데 정 회장은 다르다는 얘기다.
한 재계 고위 관계자는 "1등 기업이라는 타이틀에 안주할 법도 한데 정 회장은 기술의 변화를 끊임없이 추적하고, 새로운 방향성에 질문하고 탐구하는 모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서 "본능적으로 생존을 향해 몸부림치는 절박함, 맹렬함이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겸손함과 배우려는 자세가 습관화돼있고, 직원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모습을 보면 온화한데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보면 카리스마에 압도된다"고 평가했다.
정몽구 명예회장으로부터 엄격한 '밥상머리' 교육을 받았던 정의선 회장은 자신의 능력을 끊임 없이 증명해야 했던 아버지처럼 첫 출발도 험지였다. 정 회장은 2005년 적자에 허덕이던 기아차 사장으로 경영 무대에 데뷔했다. 당시 기아는 수출 품질 하락, 주력 상품인 SUV(스포츠유틸리티) 시장 위축, 환율 하락 등 3중고로 최악 시기였다. 내부에서는 오너 3세의 경영 포트폴리오가 약하면 승계 작업에도 차질을 빚을 것을 우려해 실적이 좋은 다른 계열사로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정 회장은 "한 번 도망가면 또 그렇게 된다"면서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위기 속에서 취임한 정 회장은 '디자인 경영'과 '품질 경영'으로 기아를 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정 회장의 승부사 기질은 2009년 현대차 부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한번 빛났다. 당시 금융위기와 자동차 수요 감소로 경쟁사들이 생산량을 줄일 때 정 회장은 "판매량 증가만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며 미국에서 구매 후 1년 내 실직하게 되면 차를 다시 사주는 '파격 보증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이 전략으로 당시 5.4%였던 현대차 미국 시장 점유율은 1년 만에 7.7%까지 반등했고, 2010년에는 포드를 제치고 글로벌 완성차 5위에 올라서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간 현대차그룹은 가성비 위주의 중저가 차량으로 승부해 마진을 타이트하게 가져가는 전략을 유지했다. 내연기관 시대에서 쌓아온 유럽 명차의 팬덤과 고유의 헤리티지를 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회장은 글로벌 브랜드를 베끼는 '2등 전략'으로는 절대 세계 최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프리미엄 브랜드'에 대한 도전을 지속한 이유다. 현대차는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해 세계 유수의 인재를 영입했다. 현대차와 기아의 디자인, 품질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도 성공적으로 론칭해 해외 시장에서 성공시켰다.
위기를 피하지 않는 그의 기질은 코로나19 때도 발휘됐다. 정 회장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반도체 쇼티지(공급부족) 문제를 직접 발로 뛰며 해결했고, 경쟁사보다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2020년 코로나19로 전 세계 자동차 판매량이 15% 이상 급감하는 시점에도 현대차그룹이 굴곡 없는 판매량을 유지한 배경이다. 비대면 생활에 지친 소비자들이 캠핑과 아웃도어에 눈을 돌리면서 주류이던 세단보다 SUV가 대세가 되고, 전기차에 앞서 하이브리드 시대가 먼저 올 것이라는 걸 알아본 눈도 그의 선견지명이다.
◆'패스트 팔로우'서 '퍼스트 무버'로...연매출 200조 시대
현대차그룹은 정 회장이 취임한 2020년 이후 4년 만에 연매출 200조원, 영업이익 30조원 시대를 열었다. 올해 상반기에는 판매와 수익 면에서 모두 글로벌 완성차 빅 3위에 안착하는 기염을 토했다. 실제 각 사가 발표한 상반기 실적을 분석한 결과 현대차그룹(현대차·기아·제네시스)은 올해 1∼6월 전 세계 시장에서 361만6000대를 팔아 도요타그룹(516만2000대), 폭스바겐그룹(434만8000대)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특히 수익성 지표에서도 현대차그룹은 매출액 139조4599억원, 영업이익 14조9059억원으로 3위를 굳혔다. 글로벌 1위인 도요타그룹의 올해 상반기 매출은 22조9104억엔(212조9000억원), 영업이익은 2조4210억엔(22조5000억원)이며, 2위인 폭스바겐그룹은 매출 1588억 유로(약 235조9000억원), 영업이익 100억5000만 유로(약 14조9300억원)를 거뒀다. 영업이익률 측면에서는 10.7%를 기록해 도요타그룹(10.6%)과 폭스바겐(6.3%)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정 회장의 리더십은 강력한 카리스마, 목표를 향한 거침 없는 추진력, 혁신을 향한 의지 등 3박자를 고루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내연기관 시대 '패스트 팔로어' 전략에 익숙했던 현대차그룹을 전동화·모빌리티 시대의 '퍼스트 무버'로 바꿔 180도 체질을 전환했다. 또 과감한 외부 인재 영입과 순혈주의 타파, 복장 자율화 등을 통해 군대 같은 수직적 기업문화를 유연하고 기민한 조직으로 바꿔 역대급 실적이라는 결과로 증명했다.
정 회장은 2020년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모든 이동 수단을 포괄하는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이라는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 로봇기업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하고, 천문학적인 적자에도 자율주행 법인 투자를 지속하며, 플라잉택시 상용화에 나서는 이유다. 정 회장은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도전을 포기하는 것"이며 "물이 고이면 썩는 것처럼 변화를 멈추면 쉽게 오염되고, 도전하지 않고 혁신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톱티어 기업을 향한 정 회장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라면서 "새로운 시장과 산업을 선점하기 위해 인력, 조직, 기술의 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 회장이 또 한번의 시험대에 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