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희 칼럼] 로드맵 없이 출발한 의료개혁…갈등과 위기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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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 총장
입력 2024-09-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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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 총장
[이재희 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 총장]

지난 2월 6일 의대 입학 정원 2000명 증원 계획을 발표한 후 발생한 의·정 갈등이 7개월 지났다. 정부는 의사 수 절대 부족을 해결하고, 필수·지역의료를 살리기 위해 의대 정원을 증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가 의료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 없이 출발해서 아직도 포괄적인 로드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초기에는 정부와 의료계가 강경 대응을 교환하는 데 머물렀으나 요새는 매일 응급 및 필수 의료대란 위기가 보도되고 있다.

의대 증원 발표 직후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으로 시작하여 의대생의 동맹 휴학과 집단 수업 거부 및 휴학계 제출로 확대되었고, 전임의들은 계약 갱신을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의대 교수들은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고 신임 전공의 수련을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의료계의 저항은 확산되었다.
의·정 갈등 초기에 보건복지부는 전공의들에게는 업무 개시 명령과 진료 유지 명령을 내리거나 2월 말일까지 미복귀 시 면허 정지 등 행정 처분과 사법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경고하고, 의협 관계자를 전공의 집단 사직 교사·방조 혐의로 고발하고, 전공의에 대해 면허 정지 절차에 착수하는 등 강경한 대응을 이어갔고, 전공의 모집 공고와 의사 국가시험(국시) 접수를 강행했지만 지원이 저조한 상태였다.

총선이 끝나고 대통령실과 정부는 유연한 입장으로 선회하여 대통령이 전공의 대표를 면담하고, 내년도에 한해 증원 인원의 50~100% 범위에서 자율적으로 감축 모집을 허용했으며,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공의들은 의대 증원 계획과 필수의료 정책을 전면 백지화할 것을 계속 요구하고 있고, 의협 신임 회장은 계속하여 강경 입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전공의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해 추진 동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의료계 내분으로 의료개혁 특별위원회에 의협과 전공의협의회 등 핵심이 불참하여 반쪽짜리 협의체가 되어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의·정 대치가 지속되는 동안 교육부는 증원된 의대 입학 정원에 맞춰 2025학년도 입시 일정을 진행하고 있고, 정부는 ‘의료개혁 1차 실행 방안’을 발표한 데 이어 ‘의대 증원 1차 실행계획’을 9월 초에 발표하겠다고 예고했다. 응급실 축소 운영과 폐쇄에 따른 의료 공백 위기가 고조되면서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은 유지하되 2026학년도 증원을 보류하자는 여당 대표의 1차 제안을 거부한 대통령실이 2차 제안에 대해서는 정원을 조정 가능하다고 수용해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

의대 정원 증원을 불쑥 발표한 정부의 조치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지역·필수·공공 의료 개선, 일부 인기 전공 쏠림 현상 개선 등 의료개혁을 위한 청사진이나 의사들의 피부에 닿는 의료 수가 조정 등에 대한 방안 없이 의대 증원만 내세운 것이다. 둘째, 지역별 의사 수요와 증원된 의대생을 교육할 교수와 시설을 위한 예산 등에 대한 공개 없이 의대 증원 인원만 발표했다. 의대 증원 2000명 산출에 대한 근거와 각 대학에 배정한 위원회 회의자료를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불신을 자초했다. 셋째, 의·정 대치가 진행되는 가운데 정부가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미복귀 전공의들에 대한 ‘행정처분 철회’라는 특례를 인정하고, 교육부는 동맹휴업 중인 의대생들의 집단 유급을 막기 위해 7월 10일 ‘의대 학사 탄력 운영 지침’을 발표하여 유급 판단 시기를 학기 말에서 학년 말로 변경하고 F학점을 받아도 유급에서 제외하도록 했다. 넷째, 이공계 발전을 위한 계획 없이 의대 정원만 대폭 증원하여 의대 진학을 위한 N수생과 대학 휴학생이 일시에 증가하고, 초등생의 의대 진학반 사교육이 성행하는 등 학생과 학부모의 동요를 키웠다. 다섯째, 의료인 양성이 10~15년 걸린다고 하지만 매년 2000명씩 증원되면 그 후에도 증원 정책이 지속 가능한지 마스터플랜과 로드맵이 없다.

의대 정원 증원 발표와 정부의 후속 조치에 대하여 의료계의 강경 대응은 문제가 있다. 첫째, 의사 양성 규모를 의료계가 결정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다. 군 간부와 법조인, 경찰관, 소방관, 교사 등 양성 인원에 대하여 해당 직역(職域)에서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결정은 국가의 책임이다. 의료계가 계속 고집부리면 미래 수입 감소를 우려하는 집단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다. 둘째, 의료계는 의·정 갈등에 대한 국민의 여론과 시선을 무시하고 있다. 의대 증원 발표 직후 80%에 육박하던 찬성 여론이 9월 초에는 56%로 낮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반대보다 훨씬 높은 찬성 여론과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중환자와 응급환자를 돌보는 환자협의회 등의 요구를 헤아려야 한다.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조속히 해소되지 않으면 추석 연휴에 응급의료가 붕괴되고, 몇 년 후에 의사가 부족한 해가 올 수 있다. 따라서 의·정 갈등 해소를 위해 정부는 대응책을 강구해야 한다. 첫째, 어설픈 의료개혁 시도에 대하여 정부가 먼저 사과해야 한다. 정부의 고집이나 땜질식 대응으로 의·정 갈등이 장기화하여 의료 참사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둘째, 의료개혁에 대하여 관련 부처 합동으로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불신을 걷어내야 한다. 필수의료 전공(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을 외면하면서 몇 개의 인기 전공(피부과·안과·성형외과)으로 의사가 쏠리는 현상, 거주 여건과 수입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지방보다 도시로 집중되는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 수가 조정 등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갑작스럽게 의대 정원 대폭 증원을 발표한 정부에 대한 의료계의 불만은 이해는 간다. 하지만 전공의, 의협, 전문의, 의대 교수, 의대생이 대화 없이 장기간 강경 대응으로 일관하는 것은 집단 이기주의로 용납될 수 없다. 정부는 이번 의·정 갈등에 책임 있는 대통령실과 정부 및 여당 관계자를 문책해야 한다. 대통령 집무실 책상에 놓인 명패의 문구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실천에 옮겨져야 한다.
 

이재희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교육학박사 ▷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원 ▷미국 텍사스대(어스틴) 연구교수 ▷한국초등영어교육학회 회장 ▷경인교육대학교 6대 총장 ▷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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