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종 칼럼] 트럼프의 귀환…'다보스 맨'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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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종 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 교수
입력 2025-02-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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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종 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 교수
[이병종 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 교수]


 
지난 1월 말에도 예외 없이 스위스의 작은 스키리조트 타운 다보스에는 전 세계의 수많은 재계 거물과 정계 실력자들이 모여들었다. 하버드대학교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에 의해 소위 다보스맨(Davos Man)이라고 불리게 된 이들은 특정 국가에 얽매이지 않고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전 세계의 경제 및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지구촌의 실질적인 지배자들이다. 특히 다국적 기업을 소유 혹은 경영하는 억만장자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발달과 이에 수반되는 세계화의 덕분으로 천문학적 재산을 축적하고 있는데 비평가들은 이들로 인해 세계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일반 대중들의 생활은 갈수록 팍팍해진다고 비판한다.
특히 뉴욕타임스의 피터 굿맨(Peter Goodman)은 2022년 'Davos Man: How Billionaires Devoured the World(다보스 맨: 억만장자들이 어떻게 세계를 먹어 삼켰나)?'라는 저서를 통해 이들의 폐해를 낱낱이 고발한 바 있다.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Jeff Bezos) 등 다섯 명의 대표적인 다보스 맨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통해 얼마나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있고 반면 전 세계 노동자들의 생활은 이로 인해 얼마나 비참해지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고발한 책이다. 국경 없는 자유로운 무역, 불공정한 세금 제도, 끊임없는 규제 완화를 통해 다국적 기업은 갈수록 탐욕스러운 확장을 거듭하고 있고 특히 다보스포럼은 이러한 불합리한 세계 경제 구조를 정당화하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렇게 난공불락으로 보이던 다보스 맨과 다보스 정신이 최근에는 많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부상하는 극우 포퓰리즘, 팬데믹과 지정학적 갈등을 거치면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차츰 그 위세를 잃고 있고 심하면 그 존립 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에 이르렀다. 특히 올해는 자유무역을 부정하며 관세 등 보호무역을 앞세워 권력을 되찾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 인해 다보스가 추구하는 중단 없는 세계화가 더욱 큰 시련을 맞게 되었다.
지난 1월 20일부터 24일까지 열린 올해의 다보스포럼은 'Collaboration for the Intelligence Age(지능 시대를 위한 협업)'이라는 거창한 주제로 열려 세계 정상 60여 명과 기업인, 관료, 학자 수천 명이 참석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예전에 비해 많이 가라앉은 모습이다. 가장 큰 행사는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화상 연설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 등 지정학적 분쟁에 대해 주로 언급했고 다보스 맨들이 기대하는 끊임없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 확산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트럼프 취임 후 첫 며칠을 지켜본 다보스 참석자들은 갈수록 세계화를 부정하고 위협하는 그의 정책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취임하기 전부터 중국, 캐나다, 멕시코에 전례 없이 높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한 트럼프는 취임 첫 주부터 강제 송환된 불법 이민자들을 거부한 콜롬비아에 대해 무려 25%의 관세로 보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콜롬비아 정부는 불과 몇 시간 만에 항복하고 말았는데 트럼프의 관세 무기화가 절대 공언이 아님을 전 세계가 목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밖에도 덴마크가 지배하는 그린랜드와 파나마가 운영하는 파나마 운하를 차지하겠다는 트럼프가 이를 위해 결국은 관세 등 보호무역 조치를 무기로 삼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었다.
트럼프의 이러한 행보는 다보스포럼이 추구해오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사실 트럼프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그의 반세계주의적 극우 민족주의에 기인한다. 그가 주창하는 America First 정책은 세계화로 미국의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며 일자리를 잃은 미국의 노동자, 특히 백인 노동자들이 그를 지지하게 만든 일등공신이다. 이번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며 그는 미국으로 일자리를 되찾아오기 위해 관세를 포함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공언한다. 관세를 피하려면 미국에 공장을 세우라는 주문이다.
트럼프가 원하는 미국 생산 시설의 귀환은 수년 간 팬데믹을 거치면서 벌써 많은 부분 실현된 바 있다. 팬데믹으로 인해 중국 등 해외 주요 생산 공장에서 제품 생산에 차질이 생기고 이 때문에 전 세계 공급망이 붕괴되자 많은 다국적 기업들은 이런 위험을 최소화하고자 공장 이전을 단행해 왔다. 시장이 가까운 자국이나 혹은 주변국에 생산 공장을 세우는 소위 리쇼어링(reshoring)이나 니어쇼어링(nearshoring)을 통해 위험을 분산하고자 했다. 여기에다 트럼프 1기부터 첨예화한 미·중 무역 갈등과 미·중 경제의 디커플링(decoupling)은 이러한 현상을 더욱 부채질했다.
트럼프가 아니어도 다보스 맨들이 원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지정학적 갈등으로 인해 심하게 훼손되고 있다. 수년 간 지속된 우크라이나 전쟁에 더해 가자에서의 전쟁, 그리고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간 군사 긴장은 전쟁 없는 평화 속에 지속적으로 확산되는 세계 경제의 통합을 추구하는 다보스의 비전을 갈수록 어둡게 만든다. 2000년대 초 냉전이 끝나고 우월성이 입증된 서구 자본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세계 질서를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sis Fukuyama)는 'End of History(역사의 종말)'라고 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낙관론은 갈수록 힘을 잃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이 신자유주의적 다보스 이념의 종말까지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다보스 맨들에게는 큰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로 대변되는 반세계화적 극우 민족주의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 등 많은 국가에서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브렉시트가 그 대표적 사례다. 그래도 그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트럼프의 신행정부가 규제 완화, 작은 정부, 세금 감면 등 자국 내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 원칙은 절대 고수한다는 점이다. 비록 대외적으로는 보호 무역을 통해 다국적 기업들의 활동을 제약하지만 이들이 국내에서 지속적으로 독점적 지배력을 유지하고 끊임없는 부의 확산을 이루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몰락하는 다보스 맨이 그나마 희망을 갖는 이유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언론정보학 박사 ▷AP통신 특파원 ▷뉴스위크 한국지국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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