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는 AI 기업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정부는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지난 설 연휴에 중국 기업 딥시크의 발표는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지금은 그 진위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지만 80억원대 개발비로 GPT-4o 수준의 생성형 AI를 개발할 수 있다는 딥시크의 발표는 AI 개발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충분했다.
국내 스타트업들도 환호했다. 빅테크와의 자본 경쟁을 포기한 시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일부 반도체 전문가들은 딥시크가 오픈AI 수준의 개발비를 투입하고도 거짓 발표를 했다고 주장하지만, 적어도 추론 성능 면에서는 딥시크의 가성비가 입증된 것으로 보인다.
배경원 LG AI연구원 원장은 지난 6월 열린 ‘국내 AI 산업 경쟁력 진단 및 점검회의’에서 “엔비디아의 H200급 GPU 2480개만 있으면 한국에서도 오픈AI의 GPT-4o 수준 모델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기도 했다. 이는 GPT-4o 수준의 생성형 AI를 개발하기 위해 14개월간 2만여 개의 GPU가 필요하다는 기존 공식을 뒤엎는 발언이다.
국내 기업들은 이처럼 자신감을 보이고 있지만 일감이 없다.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여전히 오픈AI,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미국 빅테크와 비교당하며 저평가받고 있다.
특히 정부의 태도가 그렇다. 지난 4일 행정안전부와 국가정보원 등의 권고로 정부 전 부처와 공공기관에 ‘딥시크 경계령’이 내려졌다. 각 기관은 앞다퉈 중국산 AI 모델의 보안 위험을 우려하며 딥시크 접속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AI 흐름 자체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딥시크 차단에 대한 대안으로 선택한 것은 미국산 AI였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공용 메일을 통해 GPT, 퍼플렉시티, 일레븐랩스 등 모델 사용을 부처 차원에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중소벤처기업부 역시 수요조사를 통해 일부 부서에 AI 유료 구독을 지원할 방침인데 사실상 미국산 AI 모델에 대한 지원으로 좁혀진다는 것이 내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네이버의 하이퍼클로바X는 한글 텍스트 기반 생성형 AI 모델 중에서는 사실상 GPT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라이너의 AI 검색 엔진은 퍼플렉시티에 견줄 만하다. 220개국에서 1000만명의 사용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 내 유료 구독자의 비율이 60%를 넘는 등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도 탄탄하다. 뤼튼의 AI 플랫폼 역시 적어도 국내에서는 어떤 빅테크 기업의 AI 모델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 밖에도 업스테이지, 노타 등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업들이 다수 있으며, 일부는 심지어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은 딥시크가 주요국에서 배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차원에서 딥시크 모델을 채택하며 기업을 성장시키고 있다. 미국 또한 주요 AI 사업에 자국 기업을 적극적으로 채용한다. 반면 한국 정부는 처음부터 미국산을 찾는 실정이다.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구호가 현대에 와서는 다소 구시대적인 표어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문제다. 무조건적인 국산 AI 모델 사용은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지만 최소한 우리 기업들이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국내 AI 산업을 키울 수 있는 방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