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전 대통령을 파면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단지 한 대통령의 권한을 박탈한 것을 넘어, 민주공화국의 갈림길에서 헌법의 이름으로 공동체를 다시 묶으려는 헌정적 설득의 선언이었다. 정치적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달은 상황에서 헌재가 내린 전원일치 결정은 국민 분열을 막아낸 결정적 분기점이 됐다.
이번 탄핵심판은 국회가 소추안을 가결한 지 111일, 최종 변론일로부터 38일 만에 선고됐다. 역대 대통령 탄핵 중 최장 심리 기간이었다. 선고 전까지도 법조계와 정치권 안팎에선 의견이 갈릴 것이란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일부에선 ‘4대 4’ 또는 ‘5대 3’의 찬반 결과가 나올 경우 헌재가 심각한 정당성 논란에 휘말릴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일각에선 “이런 헌재라면 존재 의미가 없다”며 폐지론까지 제기됐다.
그만큼 헌재를 둘러싼 긴장은 극에 달했다. 지난 1월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와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서울경찰청은 선고 전날인 4월 3일 갑호비상령을 발령하고 서울 전역에 경찰력을 100% 배치했다. 일부 보수단체는 무력 저항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고 당일, 문형배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낭독한 결정문 첫 문장이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로 시작되자 분위기는 급속히 달라졌다. 헌재 앞에 모였던 지지자들은 충돌 없이 자리를 떴고, 서울경찰청은 같은 날 오후 6시 갑호비상령을 해제했다. 법의 권위가 사회적 충돌을 억제해낸 순간이었다.
헌재의 결정문에는 그간의 고심과 사회적 책임의식이 고스란히 담겼다. 재판관들은 결정문 초반, 윤 전 대통령이 국무위원 탄핵과 야당 주도의 입법 강행, 예산안 삭감 등으로 국정 마비를 호소한 배경을 언급하며 “국정이 마비되고 국익이 저해된다는 인식은 정치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다”고 서술했다. 그러면서도 “국회와의 대립은 일방의 책임으로 볼 수 없고, 이는 민주주의 원리 안에서 해소돼야 할 정치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양면적 접근은 윤 전 대통령 지지층과 반대층 모두를 설득하기 위한 전략적 서술로 풀이된다. 헌재는 병력 투입 계획이 민주정치의 전제를 허무는 것이며, 헌법에 정한 대통령의 책무를 배반한 중대한 위법행위라고 판시했다.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대한국민의 신임을 중대하게 저버렸다”는 최종 판단은 단호하면서도 설득적이었다.
결정문은 형식 면에서도 헌정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해, 헌법 전문에 등장하는 “대한국민”이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 수미상관 구조는 헌법의 가치와 국민의 주권을 강조하려는 메시지를 담았다. 114쪽에 이르는 역대 최장 분량의 결정문은 법조문을 넘어, 공동체에 던지는 메시지이자 설득의 언어였다.
결정문 문체도 눈길을 끌었다. 계엄의 위헌성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헌재는 “병력을 시민들과 대치하도록 만든 것은 민주공화국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적었다. 복잡한 법률 용어 대신, 국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직관적 언어로 쓰인 결정문은 중학생들도 실시간 생중계로 시청한 탄핵 심판에 적절한 문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계도 이번 결정에 의미를 부여했다. 헌법학자회의는 4일 논평에서 “헌재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숱한 선동이 자행되었음에도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헌재의 결연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분열된 국론을 모두의 공존·공생·공영을 지향하는 국민통합의 대장정으로 이끄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대한법학교수회 역시 “이번 결정문은 국민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쉽고 유연한 논리로 구성돼 국민을 존중하는 헌재의 태도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이어 “헌법 정신을 기반으로 한 통합적 판단이야말로 민주공화국의 근간을 지키는 길”이라고 평했다.
이번 결정문은 정형식 재판관이 주심을 맡아 초안을 작성했고, 여덟 명의 재판관 모두가 결론에 서명하며 최종 확정됐다. 피신조서 채택 여부를 두고 내부 이견이 있었지만, 반대의견이나 별개의견 없이 법정의견 안에 보충의견으로 정리하며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성공했다.
‘헌재 폐지론’이 언급될 만큼 위기였던 헌법재판소는 이번 전원일치 결정을 통해 헌법의 이름으로 국민을 설득하고, 분열이 아닌 공동체를 선택하는 길을 제시했다. 8명의 재판관이 결론을 함께 낸 이 결정은 단지 대통령 한 명의 파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헌정 질서의 공적 복원을 선언한 판결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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