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26일부터 사흘간 상하이에서 열린 올해 중국 최대 규모의 반도체 박람회인 '세미콘 차이나'. 미국의 제재로 자립자강에 속도를 낸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한자리에 모여 첨단 반도체 기술을 선보인 자리였다. 올해 상하이 세미콘의 '다크호스'는 스타트업 4년차 반도체 장비기업 사이캐리어(중국명: 新凱來, 신카이라이)였다.
세미콘 차이나에 다녀온 중국의 한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사이캐리어가 첫선을 보인 반도체 장비는 반도체 첨단 노드 공정을 아우르고 있었다"며 "신제품 기술을 보려는 고객들이 부스를 가득 메웠다"고 전하기도 했다.
중국 경영 매체 중국경영보는 "중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의 기술력이 AI 업계에 충격을 안긴 이른바 '딥시크 모먼트'가 반도체 장비 업계에서 재현될 수 있다"며 "사이캐리어가 미국의 반도체 기술 '철의 장막'을 뚫을 숨은 강자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4년차 신생 스타트업...세미콘 차이나 다크호스
실제 올해 처음 세미콘 차이나에 참가한 사이캐리어는 확산·박막 증착·광학 검사·계측 등 30여종의 반도체 제조장비 기술을 선보여 모두를 놀래켰다. 에피택셜(EPI), 원자층박막증착(ALD), 물리기상증착(PVD), 식각(Etch), 화학기상증착(CVD) 등 장비들이 대표적이다. 사이캐리어는 각 생산 장비마다 어메이산(娥美山), 푸퉈산(普陀算), 우이산(武夷山), 창바이산(長白山), 아리산(阿里山) 등 중국의 명산(名山) 이름을 붙였다. 예를 들어 어메이산 시리즈인 EPI 장비는 3세대 반도체 제조 핵심 공정으로 반도체 성능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기술 장비이고, 아리산 시리즈인 ALD는 5나노 이하 선진공정의 핵심 장비다.
대부분이 반도체 첨단 공정 노드와 관련이 있는 첨단 생산장비로, 현재 네덜란드 ASML, 미국 램리서치와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 일본 도쿄일렉트론(TEL) 등 해외 기업이 장악한 분야다.
제몐망에 따르면 글로벌 시장에서 EPI 장비는 오랫동안 AMAT·TEL 등 글로벌 기업이 독점해 왔다. ALD 장비 분야에서는 ASML과 TEL이 주도하고 있으며, 두 회사의 시장 점유율을 합치면 60%가 넘는다.
제몐망은 "사이캐리어가 그간 반도체 핵심 장비 시장에서 해외 기업의 독점 구도를 타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美 블랙리스트 오른 화웨이 비밀병기?
사이캐리어의 배경에도 업계 이목이 쏠리고 있다. 2021년 설립돼 올해로 4년차밖에 안된 사이캐리어의 최대 주주는 광둥성 선전시 정부다.
사이캐리어의 시작은 화웨이의 핵심 통신기술 실험실 '싱광(星光)엔지니어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 핵심 기술 인력이 따로 나와 정부 투자를 받아 설립한 게 오늘날의 사이캐리어다. 현재는 선전시 정부 산하 산업 투자기관이 15억 위안(약 2923억원)을 투자해 100% 지분을 보유한 '국가대표팀' 반도체 장비업체로, 그간 중국 반도체 자립 전략에 발맞춰 조용히 힘을 키워왔다.
닛케이아시아는 "사이캐리어가 미국의 수출 통제로 인한 반도체 공급망 병목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ASML 등 외국 경쟁업체 제품을 대체할 장비를 조용히 개발해 왔다"며 "최근 몇 년간 해외 기업에서 엔지니어도 공격적으로 영입해 왔다"고도 했다.
사이캐리어와 화웨이의 ‘특수 관계’도 주목할 만하다. 닛케이아시아는 사이캐리어가 화웨이의 칩 생산 및 장비 제조 전문가 팀과 긴밀히 협력해 왔다고 보도했다. 다만 화웨이는 사이캐리어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사이캐리어가 2023년 선전시 정부 지원을 받아 첨단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없이 기존의 구식 DUV(심자외선) 노광장비만 사용해 5나노의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특허를 획득해 주목받았는데, 지난해 화웨이가 선보인 신제품 '메이트60 프로' 스마트폰에 탑재한 7나노 칩도 사이캐리어 장비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사실 사이캐리어는 그동안 중국 반도체 업계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 기업’이었다. 회사 공식 웹사이트에는 저사양의 네 가지 칩 장비 제품만 소개돼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이캐리어가 올해 처음 참가한 세미콘 차이나에서 대대적으로 자사 기술장비를 선보이며 기술력을 과시한 것은 자신감의 행보로 읽힌다.
사실 미국은 이미 사이캐리어의 기술력에 주목했다. 지난해 12월 미국 상무부가 새롭게 수출 통제 대상에 포함시킨 중국 기업 136곳에도 중국 대표 반도체 식각기 제조업체 나우라테크놀로지그룹(北方華創), 중국 반도체 설계자동화(EDA) 기업인 화다주톈(華大九天)과 함께 사이캐리어가 포함됐다.
상용화 검증 아직...'중국판 ASML' 갈 길 멀다

다만 사이캐리어의 반도체 생산장비는 장기적인 테스트와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의견이다. 이번에 세미콘 차이나에서 사이캐리어는 반도체 생산장비 기술을 설명하는 자리였을 뿐, 실제 양산된 설비는 공개하지 않았다. 상용화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도 보인다.
중국 반도체 전문가 천치는 중국경영보를 통해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여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다"며 "실제 고객인 주요 웨이퍼 제조회사 생산라인에서 검증을 통과해야만 할 것"이라고 전했다. 대만 디지타임스도 "사이캐리어 제품의 품질과 효과는 아직 검증을 거치지 않았다"며 "현재 사이캐리어 고객은 화웨이 산하 반도체 계열사뿐"이라고 보도했다.
반도체 생산 첨단 공정에서 사이캐리어 기술력도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다. 반도체 초미세 공정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장비인 EUV 노광장비가 대표적이다.
사이캐리어는 이번 상하이 세미콘 차이나에서 EUV 기술력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현재 ASML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EUV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업체다. 하지만 중국은 미국의 제재로 EUV 노광장비 수입이 막혀 중국 업체들은 자체적으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장비 개발에 열을 올려왔다.
리저우젠 사이캐리어 계측장비 제품라인 관계자는 현지 언론을 통해 "해외의 첨단 노드 공정은 (중국보다) 더 앞서 나가고 있다"며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첨단 생산 공정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