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이민재는 관객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남긴다. 말없이 침묵하는 순간조차 감정을 머금고, 속마음을 들킨 아이처럼 아슬한 흔적을 남긴다. 영화 '보이 인 더 풀'은 그런 이민재의 섬세함이 빛나는 작품이다.
물갈퀴를 가진 특별한 소년 '우주'가 점차 재능을 잃고 혼란을 겪는 이야기 속에서, 그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차근차근 쌓아 올린다. 단단하게 응축된 감정은 마침내 폭발하듯 터져 나와, 스크린을 타고 관객에게 조용한 파장을 전한다.
넷플릭스 '약한영웅 클래스2'의 의리파 '고현탁'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그는 이번엔 말없이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청춘의 얼굴로 관객 앞에 선다. 여름, 수면 아래 잠긴 감정과 고요한 성장통을 섬세하게 그려낸 이민재는 수면 밖으로 드러난 청춘의 흔적을 묵직한 시선으로 노래한다.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정말 '좋다'고 느꼈어요. 물갈퀴라는 설정도 새롭고 기발했고요. 또 평소 KAFA 작품을 좋아했던 터라 꼭 출연하고 싶었죠. 류연수 감독님을 만나 뵈면서 더욱더 출연하고 싶어졌어요. 확신이 생겼죠."
'우주'가 가진 물갈퀴는 '재능'을 상징한다. 이민재는 재능을 잃고 혼란을 겪는 청춘의 마음을 이해했고 섬세하게 '우주'의 내면을 다져나갔다.
"'우주'에게 공감이 많이 갔어요.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었죠. 표현도 수월했고요. 다만 우주 자체의 기질이 저와 달라서 고민이 있었어요. 그 부분을 류 감독님과 많이 이야기 했고요."

이민재는 그동안 "양식이 있는 캐릭터"를 연기해왔다며, '우주'는 보다 사적인 자신의 모습을 들여봐야 하는 캐릭터였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연기했던 캐릭터는 양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더라도 받아들이고 표현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하지만 '우주'는 달랐어요. 감독님께서 '혼자 있을 때의 모습, 사적인 모습을 담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누구보다 잘 담아낼 수 있다'며 제게도 확신을 주셨고요. 그때부터 저 혼자 있을 때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고 고민해 봤어요. 그러다 이민재 깊숙한 곳에 있는 우주를 발견하게 된 거죠. 감독님이 잘 담아주신 것 같아서 기뻐요."
‘우주’라는 인물의 내면을 따라가기 위해, 이민재는 많은 시간을 자신과 마주하며 보냈다. 카메라 앞에 서기 전, 그는 감정을 구체화하고 단단하게 붙잡기 위해 몸으로 익히는 시간을 거쳤다.
“혼자 있는 장면을 찍을 때 감독님과 그런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 ‘이 대사를 할 때 무슨 생각일까? 어떤 상태일까?’를 계속 질문해 봤죠. 전시회를 하나 다녀왔는데요, 사실 그전까진 왜 그런 작업이 필요한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막상 다녀오고 나니까, 조금은 알겠더라고요. 그 사람의 시간을 따라가고 감정을 가늠해 보는 게 왜 필요한지를요. 리허설을 하고, 또 하고, 그걸 감독님과 함께 모니터링하는데요. 갈피를 못 잡고 있던 시점이었는데, (전시회를 다녀온 뒤) 깨달았어요. 모니터 속 모습을 보니 낯선 표정을 가진 제가 있더라고요. 그제야 우주를 알 것 같더라고요."
‘우주’라는 인물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이민재는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의 원칙처럼 삼았다. 감정을 계산하거나 작위적인 움직임을 만들기보다, 그저 우주의 상태에 가까워지기 위해 시간을 들였다.
“처음엔 뭘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감정선의 갈피를 잡은 것 같다가도, 감독님께 여쭤보면 항상 ‘힘을 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더 어렵기도 했죠. 그러다 몰래 수영장에 들어가는 밤 장면을 찍고 나서… 그때 처음으로 저도 ‘아, 이제 좀 우주 같아졌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는 촬영 중에도 계속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자기 얼굴, 시선, 움직임 하나하나를 점검하고 느끼며, 마침내 확신에 가까운 감정을 얻을 수 있었다.
“방법이라고 딱 정해진 건 없었어요. 그런데 그 장면을 찍고 나서 감독님께서 ‘이제 우주 같다’고 해주셨을 때, 저도 확신이 생겼어요. 그게 되게 컸어요. 보여주시니까, 저도 믿고 갈 수 있었던 거죠.”
영화 속 '우주'와 '석영'의 감정은 말보다 시선으로, 감정보다 반응으로 전해진다. 이민재는 효우와의 호흡이 촬영에 큰 힘이 되었음을 털어놓았다.
"효우가 걱정을 많이 했어요. 부담도 있었고요. 근데 저도 그랬고, 결국엔 감독님을 믿고 갔어요. 현장에서 대화도 많이 나눴고, 시간이 쌓이면서 서로 의지하게 되더라고요. 어린 희원이랑 우주 만날 때도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이 너무 잘해줬고, 진심이 느껴졌거든요."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수영장에서 손을 맞잡고 빠지는 순간부터였다. 그 이후 이어진 장면들엔 대사보다 진짜 감정이 먼저 앞섰다.
"그때 이후 시간이 되게 기억에 남아요. 손잡고 빠지는 장면 뒤는 거의 애드리브였거든요. 물총 쏘고 도망치고, 숨어서 누나 맞지? 하고 바라보는 그 감정들... 그게 연기라기보단, 진짜 석영이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같이 뛰고 나서도 누나가 맞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연기했어요. 생각보다 장면 무드가 진하게 나왔어요. 제힘만으론 절대 안 되는 거고, 효우가 너무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가 나왔고, 그게 화면에 잘 담긴 것 같아요."

우주의 이야기를 나누며 실제 이민재의 학창 시절도 궁금해졌다. 석영이 우주의 '꿈'을 찾아주었다면 이민재는 어땠을까? 그는 "고등학교를 진학하며 연기의 꿈을 꾸게 되었다"고 말했다.
"중학교 때까지 태권도했어요. 선수는 아니었고 재미로 하던 거라 본격적으로 진로로 삼으려니 흥미가 급격히 떨어지더라고요. 친구들은 일찍이 진로를 다 정해놨고 다들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마음이 조급했어요. '뭐든 도전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시에 '태양의 후예'가 방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할머니께서 '저거 한번 해봐라. 연기 한번 해봐라'라고 제안하시는 거예요. 갑자기 번뜩, '연기를 해봐야겠다' 한 거죠."
최근 '약한 영웅 클래스2'의 흥행과 영화 '보이 인 더 풀'의 개봉이 맞물리며 가족들 역시 크게 기뻐하고 있다고.
"할머니가 요즘 엄청나게 좋아하세요. 원래는 단역이나 보조 출연만 나와도 '저 봐라, 민재 나왔다!' 하시면서 동네 소문까지 내주셨는데요. 이번엔 '약한 영웅'에 영화까지 개봉해서 더 즐거워하고 계세요. 할머니 취향은 액션에 가까워서 '보이 인 더 풀'은 조금 어려웠다고 하세요. 하하. '이해는 못했어도, 민재 나오는 건 잘 봤다'고 해주셔서 감동 받았어요."
가족 중엔 좀 더 '냉정한 평가자'도 있다. 이민재는 누나의 냉철한 반응에 마음이 들뜰 새가 없다며 웃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잘한다고 해주시는데, 엄마랑 누나는 좀 달라요. 제 얘기를 밖에서 잘 안 하고 다니시는 편이거든요. 조심스러운 것 같아요. 그런데 '약한 영웅' 보시고는 처음으로 '연기 좀 늘었네'라고 해주시더라고요. 그 말이 진짜 크게 들렸어요. '약한 영웅'이 글로벌적으로 흥행했다고 하는데, 솔직히 전 실감을 잘 안 나요. 마음이 좀 들뜨려는 순간이면 누나가 딱 잡아줘요. '메타 인지를 잘해야 한다', '팔로워 수 늘었다고 들뜨지 마라', '그런 건 다 일시적이다'… 이렇게요. 현실적으로 쿨하게 조언해 줘서, 딴생각할 틈이 없어요. 하하."

이민재의 차기작은 로맨틱코미디 '금쪽같은 내 스타'다. '우주', '현탁'과는 또 다른 결의 인물을 예고하며, 배우로서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줄 예정이다. '약한 영웅'을 통해 주목받는 배우로 성장한 지금, 그는 주어진 관심에 들뜨기보다는 더욱 단단한 마음으로 다음 걸음을 준비하고 있다.
"글로벌 스타, 그런 수식어에 흔들리고 싶진 않아요. 그냥 제가 재밌고, 좋아하는 연기를 오래오래 잘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 현장에서 선배님들 연기를 보면 '저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많거든요. 잘됐다고 해서 들뜨는 것도 결국엔 오래가지 않잖아요. 그럴수록 내가 정말 재밌어하는 걸 지켜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건강하게, 오래, 연기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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