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용 D램이 실적을 견인했던 7년 전과 달리 이번 슈퍼사이클은 인공지능(AI)에 필수인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기업용 저장장치(eSSD)가 주도할 것으로 예측된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예측대로 추론용 AI칩 시장이 커지면 그래픽 D램(GDDR7)까지 더한 'K-메모리 삼각편대'가 완성될 전망이다.
12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이번 슈퍼사이클 도래의 직접적 이유는 AI 시장 성장에 따른 고부가가치 반도체 수요 증가와 미국 빅테크 및 대형 클라우드사업자(CSP)의 서버 교체 시기가 맞물린 데 있다.
아마존이 시장 예측보다 2배 많은 신규 서버 주문량을 내놨고 오픈AI, 테슬라 등이 잇달아 첨단 메모리 발주를 예고하면서 2017~2018년을 넘어서는 장기간의 메모리 초호황이 예상된다.
애초 시장에선 HBM을 제외한 다른 메모리의 부진이 장기화할 것으로 예측했으나, 실제로는 기업들이 AI 학습과 운영에 필요한 천문학적인 데이터를 저장·관리하기 위해 eSSD 수요가 급증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2분기 eSSD 시장 매출은 51억86만 달러(약 7조3000억원)로 전 분기보다 12.7% 증가했다.
이에 사업상 어려움을 겪던 미국 샌디스크의 주가는 반년 전과 비교해 3배 가까이 상승했다. 같은 기간 일본 키옥시아의 주가도 3배 급등했다.
eSSD를 필두로 낸드 플래시 분야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솔리다임) 등 한국 기업이 주도하는 분야다. 2분기 기준 두 회사의 합산 점유율은 61.3%에 달한다. 슈퍼사이클의 수혜를 두 회사가 가장 크게 입게 되는 구조다.
특히 eSSD에 주력하는 SK하이닉스 낸드 자회사 솔리다임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이로 인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점유율 격차는 1분기 18.8%포인트에서 2분기 7.9%포인트로 크게 좁혀졌다. SK그룹의 '아픈 손가락'이던 솔리다임과 키옥시아 지분 15%가 슈퍼사이클을 맞아 실적 '효자'가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HBM의 경우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의 '공급과잉' 및 '반도체 겨울론' 주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엔비디아 블랙웰 칩의 판매량이 지속 확대되면서 호조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오픈AI가 지난 1일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5000억 달러(약 700조원) 규모 메모리 공급 협약을 맺은 데 이어 6일 AMD와 6GW 규모(약 750조원) 그래픽처리장치(GPU) 구매 계약을 맺으면서 슈퍼사이클이 기존처럼 2년 만에 사그라지지 않고 2028~2029년까지 장기화할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두 계약은 빅테크 서버 교체가 끝난 2028년부터 본격화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AI 하드웨어 시장을 놓고 삼성전자-AMD와 SK하이닉스-엔비디아 간 경쟁이 본격화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다만 삼성전자가 지속해서 엔비디아에 최신 HBM 공급을 타진하고 있고, SK하이닉스도 AMD와 HBM 공급 논의 등을 진행한 점을 고려하면 엔비디아 일변도였던 HBM 수요가 AMD·브로드컴 등으로 확대되면서 시장이 한층 커지는 신호로 해석해야 한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GDDR7 메모리도 슈퍼사이클 장기화의 변수다. 시장이 작은 소비자용 GPU와 일부 AI칩에 제한적으로 이용하던 GDDR7이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최신 AI칩에 속속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엔비디아는 128GB(기가바이트) GDDR7을 탑재한 추론용 AI칩 '루빈 CPX'를 내년 시장에 본격 공급한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도 삼성전자 2나노 공정에서 양산하는 차세대 AI칩 AI6에 HBM 대신 가격 경쟁력 면에서 우수한 GDDR 탑재를 암시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일 샘 올트먼 오픈AI CEO,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과 만난 자리에서 반도체 투자재원 확보를 위해 "금산분리 완화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슈퍼사이클 대응에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 것을 정부 차원에서 규제 완화 등으로 지원하려는 행보로 풀이된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