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타 요시히로의 한일 풍경] '모난 돌'은 오늘도 침묵한다 …일본의 '사고 정지' 시스템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오가타 요시히로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며칠 전 후쿠오카에서 한국 국회 입법조사처 이관후 처장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와 전망: 계엄과 탄핵 이후 정당정치'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당시 한국 사회가 비상계엄 사태라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려고 했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필자는 한국에서 후쿠오카로 거처를 옮긴 지 4년이 되어가는 지금에야 비로소 일본 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감기에 걸리는 일도 줄어든 것을 보면 역시 ‘자기 나라’에 살면서 스트레스를 덜 받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서 쾌적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생활 인프라를 비롯해 여러 면에서 안정적이고 별 생각 없이 지내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은 세계적으로 치안이 좋은 편이고, 밤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는 것이 그다지 위험하지 않으며, 공공장소에 짐을 두어도 도둑맞을 염려가 별로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물건을 잃어버려도 나중에 돌아오는 경우가 많은 평화로운 사회이다. 이런 면에서는 한국도 비교적 안전한 편이지만 일본은 적어도 내국인에게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라고 느낀다.

일본에서 얼마나 별 생각 없이 살 수 있는지 예를 들어보자. 한국의 횡단보도에서 보행자는 파란불이 들어오면 종종걸음으로 건너곤 한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보행자 신호가 빨간불이 되어도 상당한 시차룰 두고 차량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기 때문에 바로 차량이 달리지는 않아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너도 괜찮다. 한국의 횡단보도가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본에서는 파란불 때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면 아무 생각 없이 천천히 건너면 된다는 것이다.

택시나 버스를 탈 때 한국에서는 ‘타겠다’는 명확한 의사 표시가 필요하다. 한때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한류 열풍을 일으켰을 때 “한국에서는 왜 택시를 세우는 데 다들 이리 오라는 식으로 손짓을 하느냐”는 질문을 일본 지인에게 받은 적이 있다. 실제로 '겨울연가'를 보면 주인공 최지우가 택시를 불러 세우는 장면에서 이리 오라는 손짓을 하는데 일본에서는 그냥 손만 들어도 택시가 멈추기 때문에 최지우의 그런 동작이 특별해 보인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필자도 일본에서 택시를 부를 때 이리 오라는 손짓을 하고, 때로는 인도에서 차도로 한 발짝 내디딘 자신을 발견한다. 인도에서 한가롭게 손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는 택시를 잡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손님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경쟁심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에서 버스를 탔을 때 정류장에 멈춰 서기 전에 승객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운전사에게 주의를 받는 경우가 있다. 버스가 멈추기 전에 이동하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물론 위험한 것은 맞지만 버스가 멈추고 나서 일어서면 자신이 내리기도 전에 문이 닫히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런데 일본 대부분 버스에서는 완전히 정차한 뒤 일어나 천천히 하차구로 향해도 충분히 내릴 수 있도록 운전사가 승객이 다 내렸는지 확인한 뒤 출발하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

한국에 살 때 느꼈던 것 중 하나가 나이 들어 몸이 불편해지면 일본에서 지내는 것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일본의 공적 연금제도는 한국보다 훨씬 이전부터 정비되어 왔기에 안심할 수 있다. 최근 저출산·고령화 문제로 연금제도의 미래가 불안하다는 우려가 계속되고 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경제적 정체가 이어지며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불리는 일본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되고 있지 않은가', 과거와 같은 경제대국은 아니지만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상은 여전히 높다'고 믿고 있는 한 일본 생활은 쾌적하다.

다만 쾌적한 일본 생활은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잘 만들어진 사회 질서 범주에서만 지냈을 때에 한해 유효하며, 한번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그렇게 지내기 어려울 수 있다. 최근 일본은 많은 해외여행객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 배경으로 물가나 임금의 국제 비교에서 일본이 상대적으로 '싼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많이 지적한다. 하지만 그런 현실을 직시해버리면 희망을 가질 수 없으므로 되도록이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사고 정지’한다. 일본은 저력이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부정적인 측면을 외면하고 싶은 사람들은 ‘사고 정지’하는 동시에 '일본은 훌륭하다' '나쁜 것은 외국'이라는 위세 좋은 말을 늘어놓는 정치인에게 경도(傾倒)된다. 일본의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를 인식해버리면 불안할 뿐이므로 요인을 밖에서 찾아내려고 하고, ‘바깥의 적’을 상상하게 해주는 내셔널리스트적 주장에 의존하는 것이다. 지금 중국을 화나게 하는 다카이치(高市) 총리의 대만 문제 발언의 배경에는 그러한 일본의 안이한 여론이 존재한다고 본다.

물론 일본의 치안이나 문화에 매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일본이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쾌적한 일본 생활은 ‘동조 압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사회질서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나 이질적인 것으로 인한 변화에 매우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다. 일본 사회에서는 남의 눈에 띄는 행동을 기피하는 경향이 강하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와 같은 말로 경계심이 표현되기도 한다. 일본 사회에서는 ‘사고 정지’하고 현상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삶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재해가 많은 일본만의 삶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온화하고 다툼 없는 사회가 영위되어 왔고,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측면을 쉽게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조 압력’에 따른 ‘사고 정지’가 사회 발전을 방해하는 측면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무사안일주의’나 ‘전례주의’ ‘관례’ ‘전통’에 사로잡힌 교육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아직도 '교칙'이라고 불리는 각 학교의 독자적인 불합리한 학생 규칙이 남아 있다. 초·중·고교에서 염색이나 화장이 금지되는 정도는 ‘상식’의 범위이고 양말이나 구두의 색깔, 머리 장식 등에 제한이 있는 것은 교칙의 정석이다. 겨울 상의, 장갑이나 목도리 착용 여부 등도 학교에서 지시가 있다. 속옷 색깔 등이 정해져 있는 학교도 있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완화된 듯하지만 그래도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 교칙이 여전히 남아 있다.

어느 중학교 입학 설명회에서는 양말 색깔에 관한 교칙이 이전보다 완화된 이유에 대해 “요즘은 변호사 등이 시끄러워서”라고 학부모에게 설명했다. 인권의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그렇게 교칙을 지키도록 강요받고, 학부모 또한 그런 규칙에 의문을 갖지 않고 따른다. 교사 입장에서는 생활지도라는 이름의 관리 수행이고, 학부모는 이를 문제 삼아 ‘모난 돌’이 되고 싶지 않기에 ‘무사안일주의’를 택하는 것이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본에서는 그 의미를 묻기 전에 우선 규칙에 따르는 것이 최우선이다. ‘관례’도 규칙인 것이다.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니 어쨌든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렇게 말하는 필자도 가능한 한 ‘모난 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사고 정지’가 마음이 편한 것이다.

비즈니스 일본어에서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있는데, 거래 교섭 자리에서 '검토해 보겠습니다'라고 안건에 대한 확답을 주지 않는 것은 거부당했다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즈니스 자리에서는 '할 수 없다' '하지 않겠다' 등 표현은 최대한 피해야 하니 '쉽지 않다' '검토해보겠다' '노력해본다' 같은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이 하나의 비즈니스 매너라고 소개된다. 어떤 의미에서 책임 회피의 비즈니스 스킬이기도 하다. 

비즈니스뿐만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도 사람들끼리 식사와 같은 약속을 잡을 때 '오늘은 어렵다'는 말로 거절당했다면 그것은 '싫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한다. 정말로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뿐이라면 '언제라면 갈 수 있다' 등 어느 정도 구체적인 말이나 적어도 '다른 기회에 가자'는 말 정도를 덧붙이지 않으면 오해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물론 당사자들의 관계성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지만 일본어 회화에서 자주 있는 배려의 장면이자 일본어 화자끼리도 진의를 헤아리기 어려워 고민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장면이다. 일본의 연애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이러한 답답한 대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2000년대 일본에서 ‘눈치 없다’는 뜻인 'KY(空気読めない·공기를 읽지 못한다)'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일본 사회가 경제적 정체기를 경험하는 가운데 연공서열 및 종신고용이라는 일본형 경영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그 자리의 공기, 즉 분위기를 읽고 풍파를 일으키지 않고 넘기는' 것이 강하게 요구되는 사회가 되었다. 어려운 시기에 ‘모난 돌’이 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후 'KY'라는 말은 서서히 들리지 않게 되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눈치보기’가 더욱더 당연시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어 세계에서 ‘눈치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하는 재미있는 연구가 있다. 임영철(任栄哲 )·이데 리사코(井出里咲子) 저서인 '하시(젓가락)와 젓가락(箸とチョッカラク)'(2004년)에 소개된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어 화자와 일본어 화자(여기서는 국적이나 속성이 아니라 사용 언어가 중요하다)에게는 대화에서 끄덕거리는 ‘끄덕임’의 역할이 다르다고 한다. 대화에서 한국어 화자는 동의할 수 있는 상대방의 발화에 대해 ‘끄덕임’의 횟수가 많아지고 동의할 수 없는 발화에 대해서는 ‘끄덕임’이 줄어든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일본어 화자는 다르다. 대화에서 동의할 수 있는 발화에 대한 ‘끄덕임’보다 동의할 수 없는 발화에 대해 더 많이 ‘끄덕임’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원래 대화란 서로의 생각을 알고 공통점이나 차이점을 이해하여 필요에 따라 어떠한 타협점이나 결론을 찾아내는 소통의 한 수단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끄덕임’이란 당연하게도 'Yes'라는 동의를 나타내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동의의 발화에 대해 보다 많은 ‘끄덕임’을 나타내는 일본어 화자를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 흥미롭게도 이것은 일본어 화자에게 대화란 상호 의견을 확인해 어떠한 결론을 도출하는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한다. 일본어 화자에게 대화란 어디까지나 대화 상대와 조화로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이다. 즉 일본어 화자는 동의할 수 없는 발화를 하는 상대에게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우려해 오히려 더 많은 ‘끄덕임’을 보여줌으로써 대립관계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다. 일본어 화자에게는 대화 내용보다 ‘그 자리의 공기’가 중요한 것이다.

금방 납득하기가 어려울 것 같지만 필자에게는 짚이는 것이 적지 않다. 대학교 강의에서 토론을 시켜도 학생들은 좀처럼 상대방을 비판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관계에 오류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지적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기까지 한다. 상대방과 의견이 다른 것은 상대방과 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비판은 인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런데 이는 학생들만의 일이 아니다. 이전에 필자가 근무했던 직장에서 있었던 일인데, 세 시간쯤 이어진 어떤 회의에서 사실관계 확인 등 정보교환만 이뤄질 뿐 거의 아무도 의견을 밝히지 않은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A안을 제안했다. 특별한 반대 의견도 나오지 않았으니 A안이 그대로 결정사항이 된 것으로 생각했는데, 훗날 A안이 아닌 B안이 결정사항으로 되어 있었고 일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듣기로는 여러 가지 사정들이 있어 B안이 적당하다는 결론이 났다고 하는데, 누구의 판단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조직으로서 결정이 성립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다룬 몇몇 에피소드는 필자에 의한 한정적인 관찰에 불과하고, 필자 또한 책임 소재가 명확한 조직을 경험해본 적도 있다. 개인의 경험을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 단지 일본 사회의 ‘동조 압력’이나 ‘사고 정지’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본의 조직이나 사회에서 뭔가 일을 진행하려고 할 때, 특히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발생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사태를 들어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고 흠부터 찾으려는 상사나 '전례가 없다'든가 '위에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든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유를 가지고 ‘그 자리의 공기’가 만들어져버리는 사례를 경험한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보다는 분위기만 잡혀 있으면 이를 멈추게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전통’이나 ‘관례’와 같은 말도 ‘사고 정지’를 촉구하는 유효한 말이 되기도 한다.

과거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전쟁을 일으키고 멈추지 못한 일본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무책임의 체계'로 분석했던 것이 떠오른다. 무책임한 것만큼 편한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내가 아니라 남의 탓이다.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자리의 공기’에 휩쓸려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누군가 책임지고 발언하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누군가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스스로를 책임지고 행동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비상계엄 사태가 발생한 지 이제 곧 1년이 다 되어간다. 관련 재판이 계속되고 있으나 당시 한국 시민들이 각자 자리에서 책임을 다했기 때문에 지금의 한국 사회가 존재함을 확인한다. 사회 배경이나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일본 사회에 대한 생각이 복잡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필자 주요 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 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댓글0
0 / 300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