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JP 데스크 칼럼] 금 토큰과 아시아 외환지도의 조용한 재편

금은 오랫동안 외환시장의 바깥에 있었다. 인플레이션을 막는 방패이자 위기 때 꺼내 드는 피난처였지만, 환율을 직접 움직이는 변수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외환시장은 무역수지, 금리 차, 자본 이동이라는 익숙한 언어로 설명돼 왔다. 그러나 이 질서가 아시아에서 서서히 흔들리고 있다.

그 변화는 태국에서 가장 먼저 드러났다. 최근 달러 대비 태국 바트화는 2021년 6월 이후 최고 수준까지 올라갔다. 경기 둔화와 정치적 불확실성이 이어졌음에도, 바트화는 아시아 통화 가운데 상대적으로 강한 흐름을 보였다. 수출 경쟁력이나 기준금리, 단기 자본 유입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움직임이었다.

시장이 주목한 변수는 금이었다. 국제 금 가격은 2025년 들어 구조적으로 상승했다. 런던 현물 기준 금 가격은 온스당 4,000달러를 크게 웃도는 수준에서 움직이며 사상 최고권에 안착했다. 이는 단기 투기적 급등이라기 보다 중앙은행 매입 확대 (10% 증가) 와 지정학적 리스크가 가격을 지탱하는 흐름에 가깝다. 세계금협회 (World Gold Council)에 따르면 2025년 3분기 글로벌 금 수요는 약 1,257.9톤에 달하며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 투자 수요는 537.2톤으로 전년 대비 47% 급증해 금이 다시 전략 자산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금 가격 상승은 태국의 외환 흐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2025년 1~9월 태국의 금 수입량은 207.93톤으로 전년 동기 대비 41.9% 증가해 중국과 인도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요를 보여줬다. 수입 금액도 4,627억 바트로 크게 늘었다. 수입국 구성 역시 달라졌다. 전통적인 공급국이던 스위스와 홍콩 비중은 줄고, 중국과 아랍에미리트산 금 수입이 급증했다.

작동 원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국제 금값이 오르면 개인과 상인이 보유하던 실물 금이 시장에 나오고, 그 대금으로 유입된 달러가 바트화로 환전된다. 금 가격 상승이 곧바로 외환 수요로 연결되는 구조다. 태국 중앙은행은 금 가격과 바트화 간 상관관계가 높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왔으며, 특정 시기에는 외환 유입의 상당 부분이 금 거래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중요한 점은 이 흐름이 중앙은행의 정책적 금 매입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태국의 공식 금 보유량은 2025년 2분기 기준 234.52톤으로 세계 20위권 초반에 머물러 있다. 최근 보유량 변화도 거의 없다. 바트화의 상대적 강세는 중앙은행의 자산 운용 결과가 아니라, 민간 부문의 금 거래가 외환시장에 미친 효과에서 비롯됐다.

이 사례는 금이 더 이상 ‘조용한 자산’이 아니라 외환시장의 실질적 동인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변화는 실물 시장에만 머물지 않는다.

금의 디지털화, 이른바 금 토큰 시장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 실물 금을 담보로 발행된 금 토큰은 블록체인 위에서 24시간 거래되며 국경을 넘는다. 주요 금 토큰의 합산 시가총액은 수십억 달러 규모, 연간 거래량은 수백억 달러 수준으로 추정된다. 아직 달러나 주요 통화를 대체할 규모는 아니지만, 성격은 분명하다. 국가 신용이 아니라 실물 자산을 담보로 한 디지털 가치 저장 수단이라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외환시장은 새로운 질문과 마주한다. 자금이 원화에서 달러로 이동하지 않고, 원화에서 곧바로 ‘금 가치’로 이전된다면 환율은 어떤 경로에서 그 압력을 흡수하게 될 것인가. 금 토큰은 은행을 거치지 않고, 외환시장 영업시간에도 묶이지 않는다. 국제수지 통계와 외환 포지션 데이터에 포착되지 않는 자본 이동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아시아는 이 변화에 특히 민감하다. 금에 대한 신뢰가 강하고, 디지털 금융 수용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태국이 실물 금을 통해 이 변화를 먼저 보여줬다면, 금 토큰은 이를 훨씬 빠르고 넓은 범위로 확산시킬 가능성이 크다. 외환시장 바깥에서 형성된 압력이 사후적으로 환율에 반영되는 구조가 일상화될 수도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경상수지 흑자가 이어지는데도 원화 약세가 반복되는 현상은 이미 정책 당국의 부담으로 자리 잡았다. 이를 해외 주식 투자 확대나 글로벌 달러 강세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점점 설득력이 떨어진다. 만약 자금의 일부가 외환시장이 아니라 금이나 금 기반 디지털 자산으로 이동하고 있다면, 기존의 환율 해석 틀은 근본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

이 변화 앞에서 정책 당국이 해야 할 일은 금을 통제하거나 새로운 자산을 위험 요인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외환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는 데 있다. 자본 이동이 반드시 통화 간 이동으로만 이뤄진다는 기존 전제부터 점검해야 한다. 환율이 움직이는데 설명력이 떨어진다면, 시장보다 먼저 분석 틀이 낡았을 가능성을 의심하는 것이 순서다.

외환 안정 정책 역시 외환시장 안에만 머물러서는 한계가 있다. 은행과 달러를 전제로 한 관리 수단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금이나 금 기반 디지털 자산처럼 그 경로를 우회하는 흐름까지 포괄하지 못한다면 정책 효과는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다. 금본위제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통화 체계 바깥에서 금이 다시 ‘준통화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책 변수로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질문은 하나다. 외환시장은 과연 여전히 환율을 결정하는 유일한 무대인가.
금은 말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아시아의 외환지도 역시,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다시 그려지고 있다.
 
사진Notebook LM 인포그래픽
[사진=Notebook LM 인포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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