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더 이상 도덕적 권위도, 사회적 신뢰의 기반도 아니다. 오히려 일부 종교는 불신과 분열, 나아가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최근 불거진 통일교 관련 정치 개입 논란은 이러한 종교 불신이 결코 우연이나 일시적 현상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한 해의 끝자락, 성탄을 앞둔 지금 한국 사회는 종교를 향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지금의 종교는 신이 원하는 모습인가.”
코로나 시기의 신천지 사태, 정치 권력과 얽힌 종교 단체의 선거 개입 의혹, 탄핵 이후 극단적 정치 집회에 앞장선 일부 교회, 그리고 기복과 배금주의에 매몰된 종교 현실은 신앙이 더 이상 위로와 성찰의 통로가 아니라 사회적 갈등의 진원지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의 이름은 남용되고, 종교적 언어는 정치적 구호로 소비된다. 그 결과 시민들 사이에서는 “이런 모습이라면 차라리 종교가 없는 편이 낫다”는 냉소가 확산되고 있다.
종교는 언제부터 하늘을 향한 사다리가 아니라, 세속을 장악하는 수단이 되었는가.
종교의 본래 자리는 분명하다.
신은 붙잡아 소유할 대상이 아니라, 다시 돌아가야 할 중심이다. 신앙은 신을 동원해 인간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욕망과 분노,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종교는 신에게로 돌아가기보다 신을 앞세워 사람을 지배하려 든다. 그 결과 신은 이름만 남고, 신앙은 형식만 남는다.
종교의 핵심은 ‘깨우는 힘’이다.
종교는 사람을 길들이는 장치가 아니라, 사람을 깨어나게 하는 영적 대각성이어야 한다. 욕망을 부추기는 축복 담론, 분노를 조장하는 적대적 설교, 성찰 대신 복종을 요구하는 신앙은 종교가 아니라 권력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인간 안에 있는 탐욕과 증오, 무지를 성찰하고 넘어서는 것, 그것이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다.
모든 인간 안에는 신성의 씨앗이 있다.
종교는 그 씨앗을 키우는 역할을 해야지, 특정 집단만을 선택받은 존재로 만들거나 다수를 배제하는 논리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편 가르고, 혐오하고, 침묵시키는 순간 종교는 스스로를 부정한다. 가장 작은 존재, 가장 약한 이웃을 외면하는 종교는 신을 섬기고 있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성탄은 교회의 행사가 아니다.
성탄은 신이 권력이나 제도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세상에 응답했다는 선언이다.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지배가 아니라 낮아짐으로, 말이 아니라 삶으로 다가온 사건이다.
종교의 진정성은 얼마나 큰 건물을 가졌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려냈는가로 판단되어야 한다.
오늘 한국 종교가 회복해야 할 기준은 분명하다.
첫째, 기본·원칙·상식 위에 선 종교여야 한다.
둘째, 진리·정의·자유를 두려워하지 않는 종교여야 한다.
셋째, 인간과 문화, 자연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종교여야 한다.
정치 권력과 결탁한 신앙, 돈으로 축복을 파는 종교, 배타적 교리로 사회를 분열시키는 신앙은 신을 모독한다. 신은 가장 화려한 강단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와 가장 작은 사람 안에 있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종교는 존재 이유를 잃는다.
지금 종교에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니다.
돌아감이다.
본래의 자리로, 사람을 살리는 자리로, 갈등을 멈추고 생명을 선택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이름을 드러내기보다 길을 내고, 권위를 주장하기보다 삶으로 증명하는 종교만이 이 불신의 시대를 건널 수 있다.
종교는 지금 시험대 위에 서 있다.
이 시험에 답하지 못한다면, 종교는 더 이상 한국 사회의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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