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시도그룹 권혁(75) 회장의 여권은 사실상 멈췄다. 국세청의 역외탈세 고발이 예고된 시점이었고, 출국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이후 15년 가까운 시간 동안 128척 선단을 운용하는 해운기업의 총수는 전화와 이메일로만 홍콩 본사를 경영했다. 2016년 대법원은 법인세 포탈이라는 핵심 혐의에 무죄를 확정했다. 그러나 국세청의 과세 처분은 살아 있었고, 원금에 14년치 가산세가 더해진 체납액은 3938억원으로 불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역외탈세 고발로 시작됐지만 재판과 행정 절차가 엇갈린 채 이어지면서, 사건의 성격 자체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세·해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역외탈세는 납세의무자와 납세대상 중 하나 이상이 해외에 있는 거래를 통한 탈세를 말한다. 쉽게 풀면, 국내에서 번 돈을 해외로 빼돌리거나 해외 거래를 이용해 세금을 숨기는 행위다.
역외탈세의 주요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해외 계열사와의 거래에서 가격이나 비용을 조작하거나 커미션 수입을 빠뜨리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 투자나 현지 금융 거래를 이용해 비자금을 만드는 방식이다. 유형은 달라도 전제는 같다. 국내에서 형성된 자산이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역외탈세는 탈세 자금을 해외에 쌓아두게 되어 국내 일자리와 세원을 직접적으로 줄인다. '국부유출'이라는 말이 역외탈세에 붙어 다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에서 역외탈세 전담 조직이 생긴 것은 1986년이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 지시로 국세청 내에 역외탈세 조사 전담과가 설치됐다. 지시의 내용은 명확했다. "국부의 불법적인 해외 유출을 방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국익 보호"라는 것이었다. 해외로 자금을 빼내는 행위를 막는 것이 제도의 핵심 목적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조직은 더 커졌다. IMF 위기를 계기로 역외탈세 조사 전담조직은 36명 규모로 확대됐고, 수백억원대 외화 도피 사건들을 처리했다. 이 시기 대형 사건들은 한결같이 같은 형태였다. 국내에서 자산을 쌓은 사람이 그것을 해외로 내보낸 경우였다.
다만 역외탈세 조사업무에 정통한 전직 국세청 관계자들은 조사의 위험성도 함께 지적해 왔다. 글로벌 경제 시대에 국제경제 활동에 과도한 불안 분위기를 조성하면 숫자로 계산되지 않는 국익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권 회장의 자금 흐름은 역외탈세의 기본 도식과 방향이 다르다.
1990년 현대자동차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간 권 회장은 국내 자금을 들고 나간 것이 아니었다. 자본도 없이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했고, 1993년 마루베니 상사 사무실 한 켠을 빌려 시도그룹의 전신을 세웠다. 이후 홍콩을 거점으로 선박 금융을 구축하며 선대를 키웠다. 사업은 처음부터 해외에서 시작해 해외에서 자랐다.
그 과정에서 자금은 오히려 국내로 들어왔다. 한국 조선소 발주액만 약 71억5000만 달러, 부산 선박관리 법인 운영과 선박 보험, 한국선급 등록까지 합산하면 약 96억4000만 달러, 한화로 13조원에 가까운 자금이 국내로 유입됐다.
국세청이 탈세의 도구로 지목한 것은 특수목적법인(SPC)이었다. SPC란 특정 사업이나 자산을 위해 별도로 세우는 단독 법인이다. 권 회장은 선박 한 척당 SPC를 하나씩 세우는 방식을 썼고, 이 법인들이 조세피난처에 설립돼 있다는 것이 국세청의 문제 제기였다.
그러나 선박 한 척당 SPC를 두는 방식은 국제 해운업계의 표준적인 금융 기법이다. 선박 사고가 났을 때 위험을 한 법인 안에 묶어두고, 국제 선박 금융을 받기 위한 장치다. 국제 금융기관들은 조세 혜택 지역에 SPC를 설립하지 않으면 대출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관행이다.
비슷한 방식을 쓰는 선주는 세계 곳곳에 있다. 그리스 선주들은 본국에서 유리한 금융 조건을 얻기 어렵다는 이유로 영국 등지에 법인을 두고 경영하지만, 이것이 탈세 혐의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일본 이마바리 선주들은 파나마의 SPC를 활용해 파나마 선적 선박을 보유하면서도 실제 경영은 일본에서 하지만 탈세 혐의를 받지 않는다. 선주업에서 금융 조건과 세제 혜택이 유리한 곳에 SPC를 두는 것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관행이다.
국세청이 권 회장을 역외탈세 혐의로 고발한 논리의 출발점은 권 회장이 '국내 거주자'라는 판정이었다. 소득세법상 거주자란 국내에 주소를 두거나 183일 이상 거소를 둔 개인을 말한다. 거주자로 판정되면 전 세계에서 올린 소득 전부에 대해 한국에 세금을 내야 한다.
국세청이 근거로 삼은 것은 주민등록 보유, 가족의 국내 체류, 병원 및 신용카드 이용 기록 등이었다.
이에 대해 권 회장은 여러 차례 이의를 제기했다.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는 한 주민등록 말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탈세 의도가 있었다면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1993년부터 일본에서 활동한 기간에 대해서는 국세청이 스스로 비거주자로 인정해 과세하지 않았는데, 2006년 홍콩으로 거점을 옮기자 거주자로 전환해 과세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본 국세청에 납부한 세금 기록도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은 탈세 행위의 존재 여부보다 거주자 판정의 타당성에 더 가까웠다. 해외에서 수십 년간 사업을 영위하면서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가족이 국내에 있는 경우, 어느 나라의 납세자로 볼 것인가는 국제적으로도 아직 명확한 기준이 없는 영역이다.
2013년 1심 법원은 징역 4년과 벌금 2340억원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판단이 달라졌다. 2심 재판부는 법인세 포탈이라는 핵심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단선회사 설립과 해외 거점 활용이 국제 해운업계의 일반적 관행에 해당하며, 이를 조세 회피 목적의 위장 행위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유죄로 인정된 것은 종합소득세 약 2억4000만원 포탈에 그쳤고, 형량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줄었다. 대법원은 2016년 이를 확정했다.
형사 재판의 무죄 확정이 곧바로 과세 처분을 무력화하지는 않는다. 형사 재판과 세무 행정은 각각 다른 법 체계에서 다른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세청이 탈세 수단으로 규정한 SPC 방식을 법원이 산업적 관행으로 해석했다는 사실은, 두 판단 사이에 상당한 간격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역외탈세 개념 정립에 관여한 인물의 시각이 이 사건에 대해 남아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지낸 윤종훈 전 청장은 권혁 회장의 경우는 역외탈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윤 전 청장은 권 회장이 국내에서 단 한 푼도 해외로 가져간 것이 없고 순전히 해외에서 벌어서 국내로 가져온 사람이기 때문에, 국부유출 감시라는 역외탈세 조사의 본래 목적으로 보면 표창 대상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역외탈세 조사업무에 정통한 전직 국세청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같은 맥락의 평가가 나온다. 권혁 회장에 대한 조사는 역외탈세 조사의 역사적 배경과 목적에 비춰봐도 대상 선정 자체가 적절하지 않았으며, 무리한 세무조사로 인한 국익 침해는 숫자로 계산하기 어렵지만 실로 막대하다는 것이다.
글로벌 해운업에서 선주의 현장 활동은 사업의 본질이다. 선박 매매, 운임 협상, 화주와의 장기 계약, 선박 금융 조달은 모두 현장 네트워크와 대면 영업을 바탕으로 한다. 일본·그리스·노르웨이 선주들이 주요 금융 중심지를 직접 오가며 영업하는 것은 이 산업의 기본 작동 방식이다.
권 회장이 15년 가까이 해외 현장을 직접 밟지 못하는 사이, 국내 조선소 발주와 외화 유입이 그 이전과 같은 수준을 유지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3조원에 가까운 자금을 국내로 끌어들인 것이 현장 네트워크와 직접 영업의 결과였다면, 그 영업 기반이 15년간 묶인 데 따른 손실은 개인의 세금 분쟁으로만 환산되지 않는다.
형사 재판은 대법원 확정으로 마무리된 지 9년이 지났다. 과세 처분을 둘러싼 행정·사법 절차가 그 이후에도 이어지며 출국 제한이 유지되는 상황이 국가 경제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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