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이 변화를 제도권 영화제 안으로 끌어들인 주요 사례로 꼽힌다. 지난해 '부천 초이스: AI 영화' 섹션을 신설하고 AI 영화를 정식 상영과 경쟁의 대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AI 영화제가 아닌 기존 국제영화제 안에서 AI 영화를 어떻게 소개하고 평가할 것인지 묻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부천의 시도는 올해 칸 필름마켓으로도 이어졌다. 신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제79회 칸 국제영화제 기간 중 열린 칸 필름마켓 프로그램 '칸 넥스트'(Cannes Next)의 'AI 인 아시아'에 초청돼 'BIFAN의 AI 선도 전략'을 주제로 단독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해당 프로그램은 미디어와 기술, 투자, 정책 분야 관계자들이 아시아의 AI 기반 문화 생태계를 논의하는 자리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AI 영화 섹션을 운영하며 쌓아온 경험과 문제의식을 해외 영화 관계자들과 공유했다. 신 위원장은 칸 필름마켓의 핵심 행사인 'AI 포 탤런트 서밋'(AI for Talent Summit)에도 참석하며 AI를 둘러싼 영화산업의 변화에 목소리를 보탰다.
AI 영화가 기존 영화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면, 다음 질문은 평가 기준이다. AI로 만들었다는 기술적 새로움만으로는 영화제의 언어 안에 설 수 없다. 실제 극장에 걸린 AI 장편영화들이 어떤 가능성과 한계를 보였는지, 또 창작 윤리와 권리 문제를 어떻게 넘을 수 있는지가 함께 따져져야 한다.
국내에서는 이미 AI 장편영화가 극장에 걸리기 시작했다. 지난 5월에는 100% 생성형 AI를 활용한 장편영화 '아이엠 포포'와 '한복 입은 남자'가 동시에 개봉했다. '아이엠 포포'는 인간을 위해 태어난 AI 로봇이 잠재적 범죄성을 지닌 인간을 살해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한복 입은 남자'는 조선의 과학자 장영실이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나는 가상의 역사극을 그린다. 두 작품은 AI 영화가 더 이상 단편 실험에 머물지 않고 장편 서사와 극장 개봉의 영역까지 들어왔음을 보여준다.
물론 가능성만큼 한계도 드러났다. 두 작품의 관객 수는 수백명대에 머물며 상업적 파급력은 크지 않았다. 기술적 시도와 별개로 관객에게 영화로서 얼마나 설득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남은 과제다. 생성형 AI 영상은 긴 시간 동안 인물의 얼굴과 표정, 배경을 동일하게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장편영화 제작에는 수많은 반복 작업과 장면별 조율이 필요하다.
AI를 활용한 국내 첫 장편영화로 주목받은 강윤성 감독의 '중간계' 역시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보여준 사례다. 강 감독은 25년 전 준비했던 시나리오를 AI 기술을 염두에 두고 다시 꺼내 수정했고, 기존 제작비와 기술 환경에서는 구현이 쉽지 않았던 십이지신과 해태, 염라대왕 등 캐릭터를 AI를 통해 시각화했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은 항상 예산을 먼저 떠올린다"며 "AI를 활용하면 그 제약이 깨진다. '이게 가능하네?' 하는 순간 새로운 세계를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AI 영화가 기존 영화제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기술적 가능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창작 윤리와 권리 문제는 가장 먼저 풀어야 할 과제다. 배우 염혜란의 얼굴과 목소리를 AI로 구현한 단편영화 '검침원' 논란은 이 문제를 국내 영화계에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제작진은 초상권 사용 허락을 받았다고 설명했지만, 소속사 측이 사전 협의나 허락이 없었다고 밝히면서 영상은 비공개 처리됐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할리우드에서는 AI 배우 '틸리 노우드'의 등장으로 배우와 감독 등 업계 종사자들의 반발이 커졌다. 인간 배우의 연기와 이미지가 값싼 데이터로 대체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미국 배우·방송인 노동조합은 AI 배우를 활용할 경우 실제 배우 수준의 출연료를 부과하는 이른바 '틸리세'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고 창작자들이 AI 활용 자체를 모두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정당한 동의와 보상, 권리 보호가 전제된다면 AI는 제작 효율을 높이고 표현의 폭을 넓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기술의 활용 가능성보다 이를 뒷받침할 기준이 아직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AI가 창작자의 협력자가 되기 위해서는 학습 데이터의 출처와 권리 보상, 배우와 실연자의 동의 범위를 먼저 분명히 해야 한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AI 영화가 '진짜 사람처럼 보인다'는 기술적 놀라움만으로 승부하는 것은 1차원적인 접근일 수 있다"며 "영화는 결국 스토리가 중요하다. AI의 장점은 제작비를 크게 들이지 않고도 물리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장면을 시도할 수 있다는 데 있는 만큼, 그 기술을 어떻게 활용해 작품만의 특징을 만들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은 AI 영화만의 섹션으로 따로 평가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기술이 완벽하지 않고 실사 촬영 영화와는 다른 지점에서 몰입감이 깨지는 부분도 있다"며 "다만 이제는 AI 영화를 영화로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알던 영화 안에서 AI를 어떻게 활용하고 도구화할 것인지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짚었다.
AI 영화는 더 이상 '가능성'의 단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미 만들어지고, 상영되고, 영화제와 마켓의 의제가 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기술적 새로움에 대한 감탄을 넘어 영화로서의 완성도와 창작자의 개입, 저작권과 초상권, 산업적 책임을 함께 살피는 일이다. AI 영화가 기존 영화제의 언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지금, 영화제는 그 가능성과 기준을 동시에 시험하는 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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