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의 자투리 리뷰] 작아진 장례, 더 선명해진 삶

과거 ‘곡비(哭婢)’라 하여 장례식장에서 전문적으로 통곡을 대신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곡소리가 난무할수록 고인이 살아 생전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를 대변하는 것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사람이 많이 와 북적북적한 빈소 역시 고인의 위세를 죽음 이후에도 보여주는 장면이다. 빈소를 둘러싼 그 많은 조화의 행렬 역시 고인의 권세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빈소의 장면들은 사실상 고인을 위한 것이 아닌 남아있는 사람들의 ‘면’을 위한 것이 더 크다. 서로의 ‘면’을 위해 사실 얼굴도 본 적 없는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러 이곳 저곳 빈소의 문상객이 된다.
 
그런데 요즘은 무빈소 장례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무빈소 장례’를 검색하면 여러 상조회사들이 ‘100만원 미만 무빈소 장례’를 홍보하는 글들을 볼 수 있다. 사망자 수는 증가해도 장례식장과 상조회사는 오히려 줄고 있다. 1인가구가 늘고 고독사가 많아지는 탓도 있으나 높은 장례비용 때문도 있다.
 
그래픽연합뉴스
[그래픽=연합뉴스]

수천만원에 이르는 장례비용을 치르는 것이 점점 비합리하다는 판단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부터 사실 장례절차는 계속 간소화되고 있었다. 매장을 하는 것이 당연했던 한국의 장례문화는 2005년을 기점으로 화장률이 매장률을 처음으로 앞질렀고(KDI 자료에 따르면 2005년 화장률은 52.6%를 기록했다) 이후 화장은 대한민국 장례 방식에서 90% 이상을 차지해 사실상 굳혀졌다.

그런데 여기에 무빈소 장례까지 늘어나 무빈소 장례 비율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여러 기사에서 인용된 바, 상조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무빈소 장례 비중이 15~20% 정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백일잔치’, ‘돌잔치’를 잔치가 아니라 가족끼리 밥이나 같이 먹는 조촐한 자리로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례식 역시 가족단위, 혹은 더 작게 개인화되고 있다. 아마 더 가까운 미래에는 내 죽음을 처리할 최소한의 비용, 1인분의 비용을 미리 상조회사든 어딘가에 예치해두고 깔끔하게 이 세상을 뜨는 풍조가 자리잡을 것만 같다.
 
 
인간은 죽음 이후를 인식힌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한다. 자신의 소멸을 알고 살아가는 거의 유일한 존재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죽음 이후의 ‘사라짐’을 좀처럼 인정하지 들지 않는다.

사후세계에 뭐라도 있을 것이라는(있어야만 한다는) 강렬한 믿음과 함께 자신의 일부를 세상에 남기고 싶어한다. 훌륭한 일을 해서 명성이라든지 책이라든지를 남기거나, 아니면 대대손손 이어지는 자손을 남기거나, 그도 안되면 하다 못해 내 무덤을 만들어 나무라도 심거나 묘비를 남기려 한다.
 
사유(思惟)할 수 있는 내 존재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내 사후의 장례가 어떠했으면 하고 바라고, 유언을 남기고, 내 유골을 어디에 어떻게 두기를 바라는 마음들. 소멸 이후의 이 모든 바람은 지독한 아이러니다. 나는 내 사후의 결정들이 어떻게 진행될 지를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아이러니에도 불구하고 죽음 뒤의 일을 우리는 걱정하고 계획한다. 그것까지도 삶의 일부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출판사 김영사
[사진=출판사 김영사]
 
책 ‘죽은 자의 집 청소’는 죽은 자의 흔적을 지우는 사람의 꼼꼼한 업무 일지다. 참 다양한 죽음의 흔적을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도대체 묘사가 불가능한 냄새부터 현장에 엉겨붙은 잔해들 같은 생물학적인 흔적뿐 아니라 컵, 옷, 약봉지, 영수증, 책, 사진 등 살아 생전의 모습이 엮여 있는 사물들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르게 남는 것은 죽은 자가 가졌던 ‘정서’의 흔적이다. <내 마음도 모르면서>라는 제목의 책을 남긴 20대 여성에게서 외로움의 흔적을 보고, 문이 안 열릴 정도로 천장까지 쌓은 쓰레기 더미에서 극심한 우울의 흔적을 본다.
 
현관문에 붙은 ‘전기 공급 제한 예정 알림’ 스티커에는 지독한 가난의 흔적이, 엄청난 서가의 책을 남긴 여성에게서 오래전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흔적을 본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흔적은, 흔적을 최대한 없애려 했던 누군가의 분리수거다. 착화탄에 불을 붙인 도구들마저 분리수거 해 놓은 망자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죽음 이후의 일을 이토록 염려하고 애를 쓰다니.
 
혼자 사는 삶, 죽음의 절차가 점점 개인화된다.
 고독사가 증가하는 것, 장례의 절차가 간소화되는 것, 죽음의 소식을 널리 알리지 않는 것. 점점 죽음의 절차가 비공식화되고 개인화되고 있는 듯하다.
 
가족이 있건 없건, 점점 더 같이 살기 보다는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진다. 혼자 산다는 것은 혼자 죽는다는 필연적인 결말을 예비하고 있다.
 
간소해진 장례가 단순히 허례허식의 소멸만은 아닐 것이다. 예전에는 죽음이 가족의 일이고, 마을의 일이었으며 혹은 일터에도 영향을 미치는 큰 사건이었지만, 지금 파편화된 개인은 죽음 역시 한 생의 마감이며 그 일부일 뿐이다.
 
혼자 맡게 될 죽음을 부산스럽지 않게, 그리고 남겨진 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죽음 이후의 흔적을 신경쓰고 배려하는 것. '죽은 자의 집 청소'를 보며 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인간성을 만난다.
 
사진AI 생성 이미지
[사진=AI 생성 이미지]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내 존재가 이 세상에 남겨지길 바라는 강렬한 욕구를 생애 내내 품고 산다. 인간은 자신의 소멸이 기정사실화 된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 욕구가 강렬하다.
 
그러나 점점 혼자 살게 된 사람들은 혼자가 되면 될수록 그 강렬한 사후 존재의 욕구를 누르고 그저 소박한 흔적 몇 가지를 남긴다. 사후 세계에서의 존재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할지언정 남은 사람들에게 보여질 내 생의 흔적만큼은 좋은 인상으로 남을 수 있게 말이다.
 
죽은 자의 흔적은 남은 자에게 생의 무게를 다시 곱씹게 한다. ‘죽은 자의 집 청소’에 서술된 그토록 고립된 죽음에, 슬퍼하기 보다는 오히려 생의 가치를 더 생각하게 된다.

죽은 자가 머물렀던 공간에서 발견된 이력서, 읽다 만 책, 쓰다 만 컵 등을 보며 그가 가까스로 넘긴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단했을까를 공감하는 동시에, 그래서 죽음보다 삶이 더 선명해진다.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는 것은 누군가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일이 아니라 생의 찬란한 순간을 하나 하나 끄집어내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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