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환 종합편집부장·부국장
기득권과 반칙은 이제 그만… MZ세대의 눈물 닦아줘야
몇 년 전 아파트 청약에 당첨돼 내년 입주를 앞두고 있지만 중도금과 잔금을 마련하는 일은 녹록지 않다. 출산 계획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렸다.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맞벌이를 하고, 헬스장 대신 동네를 뛰며 운동한다. 반찬은 수시로 친정집 도움을 받는다. 전세보증금을 아끼기 위해 남은 1년은 낡고 저렴한 사택으로 옮겨갈 계획이다. “내 스스로 집을 장만하고 나면 아이도 생각하고 빚도 갚으면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딸은 요즘 청년 세대가 처한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의 삶은 게으르거나 눈높이가 높아서 힘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기득권 세력의 반칙이나 특혜를 기대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원칙을 지키며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 사회를 원할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기대를 번번이 배신하고 있다.
출산도 미루고 부동산 마련에 ‘영끌’
최근 서울 아파트 매매시장에서 30대 이하 매입 비중이 절반에 육박했다는 통계는 청년층의 절박함을 보여준다. 과거 초저금리 시절의 ‘영끌’과는 상황이 다르다. 지금은 대출 규제가 강화됐고 금리도 높다. 그럼에도 청년들은 주식과 가상자산을 처분하고 생애 최초 주택 구입 대출을 활용해 집을 사려고 한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평생 집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한국은행 역시 최근 보고서를 통해 부동산 가격 상승이 자산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으며, 청년층의 자산 형성 기회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취업해 중상위권 소득을 올려도 부모 세대가 축적한 자산의 벽을 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미루는 이유도 결국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오늘날 MZ세대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집값만이 아니다. 청년들이 진정으로 분노하는 지점은 자신들이 믿고 의지해야 할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노력하면 보상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흔들리고,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무너질 때 청년들의 좌절은 분노로 바뀐다.
지난 6·3 지방선거 당시 서울 송파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바로 그런 불신을 증폭시킨 사건이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국민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절차이며, 그 어떤 행정보다 정확하고 공정해야 한다. 그런데 투표를 하기 위해 긴 시간을 기다렸던 유권자들이 투표용지가 부족해 발길을 돌리거나 혼란을 겪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히 청년층은 이 문제를 단순한 행정 착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렵게 시간을 내 투표소를 찾은 유권자들에게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당신의 한 표는 중요하지 않다”는 메시지처럼 느껴졌을 수 있다. 실제로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 일대에 모여든 많은 청년들은 자신들을 특정 정당의 지지자도, 특정 정치세력의 행동대원도 아닌 ‘유권자’라고 규정했다. 그들이 주장한 것은 거창한 혁명이 아니었다. 국민 주권과 참정권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여기서 기성세대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오늘날 2030세대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교육 수준이 높고 정보 접근성이 뛰어난 세대다. 동시에 가장 공정성에 민감한 세대이기도 하다. 입시와 취업, 승진과 투자까지 모든 과정에서 공정한 규칙을 요구한다. 그래서 특혜와 반칙을 유난히 싫어한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부른 공정
그런 세대가 바라보기에 부동산 시장은 이미 공정한 운동장이 아니다. 부모의 자산이 출발선을 결정하고, 집값 상승은 노력보다 자산 보유 여부에 따라 부를 결정하는 구조처럼 보인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핵심 절차인 선거마저 혼선을 빚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그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
최근 거리로 나온 청년들의 모습은 단순한 정치적 행동으로만 해석하기 어렵다. 그 이면에는 누적된 상실감과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집을 사기 위해 출산을 미루고, 미래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야 하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이 있다. 열심히 살아도 계층 이동이 어렵다는 무력감도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소리가 정치권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소외감 역시 존재한다.
물론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하거나, 확인되지 않은 주장들이 확산되면서 사회적 갈등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충분히 경청할 필요가 있는 의견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년들의 분노 자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분노하는지, 왜 거리로 나오게 됐는지 들여다보는 일이다. 병의 원인을 외면한 채 증상만 비판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청년들의 목소리를 정치적 유불리의 관점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내는 경고 신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다.
40~60세대 역시 이 문제를 남의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청년들은 가까운 미래의 대한민국을 떠받칠 세대다. 그들이 결혼을 포기하고, 출산을 미루고, 정치에 대한 신뢰마저 잃는다면 결국 그 대가는 사회 전체가 치르게 된다. 청년의 절망은 곧 국가의 절망이기 때문이다.
희망을 실현하는 정책으로
이제 정치권이 답해야 한다. 무엇보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이 필요하다. 선거의 공정성과 신뢰는 민주주의의 생명선이다. 사소한 의혹조차 남겨서는 안 된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설명과 책임 있는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동시에 청년들의 자산 형성 기회를 확대하는 정책 전환도 필요하다. 단순한 현금 지원이나 일회성 대책만으로는 부족하다. 주거 사다리를 복원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고, 노력한 만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되돌려줘야 한다.
내 딸이 원하는 것은 특혜가 아니다. 많은 2030세대가 바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집 한 채 마련할 수 있다는 희망, 아이를 낳아도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 그리고 투표하면 자신의 한 표가 온전히 존중받는다는 신뢰다.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다. MZ세대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청년 몇 명을 위로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다. 이제 기성세대와 정치권이 응답할 차례다. 청년들이 다시 노력의 가치와 공정한 룰을 믿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시대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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