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자의 고위공직자 도덕 이야기] 특혜는 누리고 책임은 잊어버린 공직사회

  • 국민의 심부름꾼임을 잊어버린 일부 공직자와 권력자들에게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단순한 법조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 나라를 움직이는 모든 권력자들에게 내려진 준엄한 명령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통령도 국민이 선출하고 국회의원도 국민이 선출한다. 지방자치단체장도, 지방의원도, 헌법기관의 수장도 결국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공직자는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이고, 지배자가 아니라 심부름꾼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보면 이러한 민주공화국의 기본 원칙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최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최고 책임자의 해외출장 과정에서 배우자 동반 비용이 세금으로 처리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비판이 이어졌다. 법적 판단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국민들이 문제 삼는 것은 상식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의 최고 책임자가 과연 국민의 눈높이에서 행동했느냐는 질문이다. 선관위는 헌법기관장에 대한 예우 차원이라고 설명했지만 국민 다수는 쉽게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 사건 하나가 아니다. 지방의회의 해외연수 논란은 해마다 반복되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사실상 관광 일정에 가까운 해외출장이 문제가 되었고, 어떤 곳에서는 항공료 부풀리기와 예산 집행의 부적절성이 지적되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전국 지방의회 국외출장 실태를 조사한 결과 항공권 조작, 과다한 체재비 지급, 외유성 일정 등 다수의 문제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국민들은 묻는다. 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예외를 요구하는가. 왜 규칙은 국민에게는 엄격하고 공직자에게는 관대한가. 왜 책임은 국민이 지고 특혜는 권력이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가. 이 질문은 어제오늘의 질문이 아니다.

연세대 송복 교수는 오래전 ‘특혜와 책임’에서 한국 사회 지도층의 가장 큰 문제를 "특혜는 누리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진단은 여전히 유효하다.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은 법적으로는 신분제가 사라진 나라다. 그러나 의식 속에는 여전히 신분사회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과거 양반이 누렸던 특권의식이 오늘날에는 권력과 직위의 형태로 되살아난 것이다.

고시에 합격하고,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되고,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시장과 도지사가 되고, 공기업 사장이 되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내가 이 정도 위치까지 왔는데 이 정도 대우는 받을 수 있지 않은가." "오랫동안 국가를 위해 봉사했는데 이 정도 예우는 당연하지 않은가." 이러한 생각이 자리 잡는 순간 공직은 봉사에서 특권으로 변한다.

그러나 인류의 위대한 경전들은 전혀 다른 길을 가르친다. 성경은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불교의 법구경은 "자기를 이기는 자가 천 명을 이기는 자보다 위대하다"고 말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남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강과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장 높은 지도자는 가장 낮은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공자는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도자가 먼저 바로 서야 백성이 따른다는 것이다.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군주는 가장 가볍다"고 했다. 2500년 전 이미 민주주의의 핵심을 꿰뚫어 본 말이다. 동서양의 성현들이 남긴 가르침은 놀랍도록 일치한다. 권력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다.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과 배터리 산업은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의 품격은 경제 규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지도층이 있는가. 권한이 커질수록 더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적용받는가. 공직자가 국민보다 더 큰 책임감을 갖고 있는가. 바로 이것이 선진국의 기준이다.

오늘날 2030세대가 분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청년들은 단순히 취업난과 집값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다. 공정해야 할 사람들이 공정을 지키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보다 먼저 ‘도덕감정론’을 썼다. 그는 시장경제의 발전을 이야기하면서도 인간의 양심과 절제가 사라지면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오늘 대한민국이 다시 읽어야 할 책은 어쩌면 ‘국부론’보다 ‘도덕감정론’인지도 모른다.

공직은 특권이 아니다. 국민이 맡긴 책임이다. 권력은 명예가 아니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라는 의무다.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권한이 아니다. 더 큰 책임이다. 더 높은 자리도 아니다. 더 낮은 자세다.

특혜는 순간의 달콤함을 준다. 그러나 책임은 역사를 만든다. 그리고 국민은 결국 특권을 누린 사람보다 책임을 다한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한다.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5일 경기도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5일 경기도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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