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이 디벨로퍼와 신탁사를 동시에 흔드는 가운데 코람코자산신탁이 다른 길을 택하고 있다. 위험도가 높은 책임준공형 토지신탁 노출은 줄이는 대신 리츠와 기관투자가 자금을 기반으로 개발사업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코람코는 최근 서울 서초구 ‘강남역 L프로젝트’를 통해 ‘신탁형 디벨로퍼’ 모델을 선보이고 있다. 신탁형 디벨로퍼는 빚을 늘려 사업 규모를 키우는 전통적인 시행사 방식과 달리 ‘투자-개발-운용-매각’을 하나의 플랫폼으로 묶는 방식이다.
강남역과 인접한 서초동 1323번지 일원 약 5300㎡ 부지에 연면적 약 2만평, 지하 6층~지상 23층 규모의 프라임 오피스를 개발한다. 총사업비는 약 1조원, 준공 목표는 2031년이다.
사업 규모만 놓고 보면 일반 대형 디벨로퍼와 다르지 않다. 차이는 위험을 떠안는 방식에 있다. 코람코는 서울 주요 업무지구에서 약 22만평의 오피스를 공급한 SK디앤디와 공동투자·협업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자체 투자·운용 역량에 전문 디벨로퍼의 개발 경험을 결합해 한 회사가 개발 위험을 모두 부담하는 구조를 피한 셈이다.
코람코가 대형 개발에 나설 수 있는 배경에는 PF 위기 이후 진행한 재무구조 개선이 있다. 올해 3월 말 자기자본은 5213억원, 부채비율은 27.9%다. 부채비율은 2024년 말 41.7%에서 지난해 말 31.0%로 떨어진 뒤 올해 들어 다시 낮아졌다.
다른 신탁사들이 책임준공형 토지신탁의 우발채무 현실화와 신탁계정대 회수 지연으로 신용등급 하향 압력을 받는 것과 대비된다. 코람코는 신규 책임준공형 토지신탁 수주를 제한하고 기존 사업장의 회수와 충당금 적립을 병행해왔다. 신탁사업에서도 도시정비사업과 담보신탁, 관리형 토지신탁 등을 중심으로 선별 수주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 결과 NICE신용평가와 한국신용평가는 올해 코람코의 기업신용등급을 각각 A·안정적(Stable)으로 유지했다. 기업어음도 A2 등급을 받았다. NICE신용평가 기준 신탁업계 최고 수준의 신용도를 9년 연속 유지했다.
◆ 빚 대신 기관자금…62조 플랫폼이 개발 밑천
개발의 밑천도 일반 시행사와 다르다. 코람코는 리츠와 부동산펀드, 신탁을 통해 최근 약 62조원의 부동산 자산을 운용·관리하고 있다. 지난 3월 약 54조원 규모에서 수개월 사이 8조원가량 증가했다.
특히 리츠 시장에서 기반이 강하다. 한국리츠협회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코람코는 48개 리츠, 16조3574억원을 운용해 시장점유율 12.8%를 기록했다. LH를 포함한 국내 리츠 AMC 가운데 1위다. 민간 AMC가 민관 통합 기준 1위로 올라선 것은 약 10년 만이다.
기관자금도 들어오고 있다. 코람코는 최근 공무원연금공단과 우정사업본부의 국내 부동산 블라인드 투자 위탁운용사로 잇따라 선정됐다. 관련 투자 규모는 약 1조원에 달한다. 투자 대상을 미리 정하지 않고 운용사를 먼저 선정하는 블라인드펀드는 자산 발굴과 금융구조 설계, 운용·회수 능력에 대한 기관투자가의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
이 자금이 코람코식 개발의 핵심이다. 일반 시행사가 토지를 매입한 뒤 브릿지론과 본PF를 통해 레버리지를 일으킨다면 코람코는 리츠·펀드와 기관투자가 자금을 결합해 개발 초기부터 자본구조를 설계할 수 있다. 완공 이후에도 직접 자산을 운용하거나 매각해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
이미 한 차례 성과도 냈다. 코람코가 직접 기획·개발한 강남역 ‘케이스퀘어 강남2’는 올해 3550억원에 매각됐다. 총 투자비는 약 2200억원으로 매각차익만 1350억원에 달했다. 단일 자산 기준 내부수익률(IRR)은 20%를 웃돌았다. 토지를 확보하고 2019년 개발에 착수한 뒤 2022년 준공, 운용을 거쳐 매각까지 직접 수행했다.
강남역 L프로젝트는 이 모델의 규모를 1조원대로 키우는 시험대다. 코람코는 서울시 사전협상을 거쳐 용도지역 상향과 공공기여 등을 추진하고 기준층 전용면적 약 500평, 천장고 3m의 대형 프라임 오피스를 만들 계획이다.
◆ 오피스 넘어 데이터센터·호텔…‘개발형 운용사’ 확장
코람코의 개발 확장은 오피스에 그치지 않는다. 데이터센터에서는 부지 발굴과 전력 확보, 금융구조 설계, 개발관리, 운영사 선정까지 개발 전 과정을 내재화하고 있다.
경기 안산 시화국가산업단지에서는 브룩필드 계열 DCI와 40MW급 AI 데이터센터를 공동 개발 중이다. 코람코가 자체자금과 운용자금을 PFV에 투자하고 AMC로서 금융구조와 설계·시공관리를 맡는 구조다. 서울 가산 데이터센터에 이어 의정부 리듬시티에서도 100MW 규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32년까지 데이터센터 분야에 약 10조원을 투자한다는 목표다.
호텔과 렌탈하우징도 새로운 축이다. 자회사 코람코자산운용이 을지로 U5호텔을 인수해 2성급 호텔을 4성급 ‘머큐어 앰배서더 동대문’으로 탈바꿈시켰고 향후 5년간 호텔·레지덴셜 관련 운용자산을 5조원까지 늘릴 계획이다. 개발과 리모델링, 브랜드 도입, 운영, 매각을 하나로 묶는 방식이다.
남대문 에티버스타워는 구축 오피스를 사들여 전면 리모델링하고, 현대자동차 전국 11개 사업거점은 5800억원 규모 리츠로 유동화했다. 신규 개발뿐 아니라 노후자산 재생과 기업 부동산 유동화까지 개발의 범위를 넓히고 있는 셈이다.
관건은 이 같은 확장 과정에서도 코람코의 강점인 보수적인 재무구조를 유지할 수 있느냐다. 강남역 L프로젝트는 준공까지 5년가량 남아 있어 공사비와 금리, 임대시장 변화를 피할 수 없다. 개발형 자산과 데이터센터·호텔 등 운영형 부동산 비중이 빠르게 늘어날수록 기존 리츠 중심 사업보다 리스크 관리 수준도 높아진다.
코람코 관계자는 “개발사업 역시 단순히 외형을 키우기보다 투자와 운용 역량을 결합해 리스크를 관리하는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며 “강남역 L프로젝트는 그동안 축적한 개발·운용 역량을 집약해 경쟁력 있는 업무시설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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