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대표하는 유럽 굴지의 기업들이 최고경영자(CEO)를 채용하는데 있어 국경을 가리지 않고 있다.
국적이야 어떻든 능력과 노하우를 갖춘 인물에게 회사의 경영을 맡기는 기업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으며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유럽이 경제 연합을 모색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유럽 기업의 마지막 요새로 여겨졌던 CEO의 문이 활짝 열렸다.
대표적으로 영국 증시의 벤치마크 FTSE 지수를 구성하는 100개 기업 가운데 34개 기업의 CEO는 영국인이 아니라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이 최근 분석했다.
지난 10년 간 영국은 물론 미국과 호주와 같은 대영제국의 테두리에 속한 경영진의 비중이 컸지만 최근에는 15명의 미국인과 3명의 프랑스인을 비롯해 스웨덴과 스페인, 인도 등 다양한 국적의 CEO들이 활동하고 있다.
특히 카자흐스탄 최대의 동(銅) 생산업체인 카작무스의 차용규 전 CEO는 삼성그룹 출신으로 카자흐스탄 최대 기업을 키워낸 장본인으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프랑스 CAC40 지수를 구성하는 40개 기업 가운데 7개 기업의 CEO가 외국인이며, 독일의 DAX 지수 구성 종목의 30개 기업 가운데 5개 기업이 독일인이 아닌 CEO가 경영한다.
10년 전 CAC지수 구성 기업 중 외국 CEO가 경영하는 기업은 1개에 불과했으며 독일의 경우 한 곳도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족의 발전인 셈이다.
국가 간에 CEO 교환이 늘어나면서 CEO를 채용하는 방법들도 변화하고 있다. 다른 국가들로부터 국제적 경험이 풍부한 관리자들을 '수입'해서 고위 직책에 투입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유로존을 대표로 유럽 경제 연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회사의 최고 위치는 자국 출신의 경영진의 몫으로 남겨두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최근 일고 있는 변화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말한다.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구축하려는 유럽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국제 비즈니스의 험난함과 복잡함을 알고 국가들의 다른 문화를 초월하여 직원들과 경영을 통합할 능력을 가진 인물을 채용한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자본시장의 세계화와 함께 민간 자본에 대한 기업들의 의존도가 높아지게 된 것 역시 CEO의 국적이 아닌 능력을 중시하는 흐름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사진설명: 프랑스 최대 유통업체 까르푸 로고> |
<사진설명: 까르푸의 조세 루이스 듀란 CEO, 최고재무책임자(CFO)였던 그가 CEO로 발탁되었을 당시 유통회사 CEO로서 요구되는 유통 경영 경력은 전무했다.> |
유럽 주요 기업 중 국경을 초월한 CEO의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 유통업체 까르푸의 호세 루이스 듀란 CEO다. 스페인 출신의 듀란은 1994년 까르푸에 들어갔을 때 프랑스어라곤 조금도 하지 못했다며 그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출근 첫날부터 프랑스어에 대한 집중훈련을 가졌다”면서 "기업 문화 역시 충격적이었지만 빨리 배웠다”고 말했다.
10년 후 그는 41세의 나이로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까르푸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다.
전문가들은 세계 비즈니스계에 다양화를 위한 움직임은 이제 막 시작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유럽 기업들이 여전히 자국민에 의해 운영되고 있지만 앞으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경우 MIB 지수 구성 종목의 40개 기업 중 2개 기업의 CEO가 외국인이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자동차기업인 피아트의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CEO는 캐나다와 이탈리아 시민권을 둘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다른 기업들 역시 훌륭한 경험과 능력을 갖춘 CEO를 물색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국적을 앞세운 성역지키기를 비롯한 대외 강경론적인 자본주의 시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헤드헌팅업체 러셀 레이놀즈의 루크 메이넬 영국 사업부 책임자는 "현명한 국제 기업과 이사회는 '일에 가장 적합한 경영진을 찾아라'고 말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제 국적이 중요한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이미 이같은 흐름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CEO가 아닌 경영진 중 상당수는 비국적인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사진설명: 영국의 레버브러더스와 네덜란드의 마가린유니에가 합동으로 설립한 유지업의 세계적 트러스트, 유니레버 로고> |
유니레버의 이사는 총 6명으로 이중 영국인과 독일인은 한 명도 없다. 미국인과 인도인이 각각 2명, 남아프리카인과 프랑스인이 각각 1명씩 있다.
관계자들은 이들 가운데 한 명이 차기 CEO가 될 것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
프랑스의 까르푸 역시 듀란 CEO를 제외하고 5명의 이사 가운데 2명이 스페인 국적을 소유하고 있다.
IHT는 유럽에서 외국인을 CEO로 영입하는 물꼬를 튼 것은 프랑스 화장품업체 로레알이라고 평가한다.
<사진설명: 세계 최대 화장품 업체인 프랑스의 로레알 로고> |
<사진설명: 세계 1위의 화장품 회사 로레알의 회장 린제이 오웬 존스. 프랑스의 화장품 회사에 불과했던 로레알을 세계 최고의 다국적 기업으로 끌어올린 주인공이다.> |
로레알은 지난 1988년 웨일스 국적의 42세 린드세이 오웬 존스를 대표이자 CEO로 선택했다.
그러나 오웬 존스가 프랑스에서 비즈니스 학교에서 학위를 받았고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했다는 감안하면 본격적으로 능력에 기초해 외국인 CEO를 채용했다고 보기 힘들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헤드헌팅 전문가들은 이제 문화를 넘어선 경영인의 헤드헌팅은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중요한 시기에 들어섰다고 보고 있다.
유럽과 미국을 선두로 하는 기존 선진국의 성장이 둔화되고 중국을 비롯한 이머징마켓이 세계 성장을 주도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회사들은 글로벌 경험을 갖춘 인물을 채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까르푸의 듀란은 “까르푸는 유러피안과 라틴아메리카의 조화”라고 말했다. 그는 스페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마드리드에서 자랐고 스페인어와 독일어에 능숙하다.
또 최근 글로벌 CEO 사회를 살펴 보면 '열려있는 그룹으로 어떤 제한도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사진설명: 명품업체 구찌의 52세 CEO 로버트 폴렛. 유니레버에서 26년간 일했지만 명품업계에서는 완전 무명이었던 그는 국제적 감각과 사업경력을 인정받아 2004년 구찌의 CEO로 취임했다.> |
구찌그룹의 로버트 폴렛 CEO는 26년의 시간을 유니레버에서 보냈지만 본사에서 멀리 떨어진 독일, 말레이시아, 벨기에 등지에서의 경력이 대부분이다.
그러던 2004년 삐노(Pinoult) 일가가 구찌를 80억 달러에 인수하며 CEO를 찾아 나섰고, 폴렛을 찾았을 당시 구찌는 이탈리아의 뿌리를 가진 프랑스 오너 소유의 회사로 본사는 런던에 있으며 전 세계를 시장으로 하는 회사였다.
그는 "처음 왔을때 문화적인 차이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폴렛은 1990년대 구찌를 일으켜 세운 도미니코 데졸레(Domenico De Sole)의 집에서 머물고 구찌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데졸레가 교육과 경영 경험이 미국인과 다름없었다면서 "구찌는 프랑스의 것도 이탈리아의 것도 미국의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구찌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영은 중국인 미미탕이 맡고 있고, 일본시장은 일본인에게, 미국시장은 미국인에게 맡기는 것처럼 지리학적인 구분을 통해 지역별 경영을 갖춰나갔다는 점을 강조했다.
유럽기업의 국적에 구분 없는 경영진 채용은 확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자본의 세계화에 따라 하나의 회사를 구성하는 자본이 여러 국가로부터 형성되고 이는 다양한 국적의 이사회를 구성하게 되는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러셀레이놀즈의 하름 반 에크 암스테르담 사업부 책임자는 "네덜란드의 경우 이사회의 절반 정도가 네덜란드 인"이라면서 "이는 나머지 절반은 외국인이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국적이 다르더라도 회사에 오랜 기간 근무한 직원이 경영진에 성공적으로 투입되는 것이 더욱 이상적일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사진설명: 영국과 네덜란드 합작기업인 유니레버 창립 78년만에 처음으로 단독 최고경영자가 된 패트릭 체스코> |
유니레버의 패트릭 체스코 CEO가 대표적인 예라고 IHT는 전했다. 영국-네덜란드 다국적 기업이라는 특성상 경영 구조를 확립하기에 힘들었던 유니레버는 CEO도 2명이었고 본사도 두 곳에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유니레버는 새로운 계획 아래 영국출신도 네덜란드 출신도 아닌 프랑스인 체스코가 단독 CEO가 된 것은 회사 창립 78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체스코는 프랑스에서 유니레버의 경력을 시작한 인물이기에 이같은 일이 가능했다는 평가다.
체스코 CEO는 "독일인 부인과도 겪지 못한 문화 충격을 독일 유니레버 회사로 옮겨오며 겪었다"고 말했다.
CEO의 국적이 다른만큼 심각한 수준의 문화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은 해결해야 할 과제다.
미탈스틸과 아르셀로의 합병이 대표적인 예다. 세계 최대 철강업체 미탈스틸과 2위업체 아르셀로의 합병으로 화제가 됐지만 인도 출신의 락시미 미탈 회장이 권좌에 앉으면서 유럽의 다국적기업이었던 아르셀로는 엄청난 후폭풍에 처한다.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프랑스 사업부의 직원 1100명 중 절반을 정리해고한 것이다.
인도인 경영자인 미탈이 해고를 결정하자 프랑스 노동자들은 사장 집무실에 난입하여 가구와 서류들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는 등 심각한 충돌을 빚기도 했다.
오성민 기자 nickioh@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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